죽거나 말거나읽음

박구용 전남대·광주시민자유대학 교수

미지의 생명과 주권을 내세워
날것의 생명과 주권 위협하는
이들이 내세운 건 노예도덕과 복수

남들이 세운 복수의 칼날 위에서
우리 대통령 부부는 왜 춤을 출까

Roe is gone. ‘로’는 갔다. 스스로 떠난 것이 아니라 강제 추방됐다. 미연방의 늙수그레한 대법관들이 모든 여성을 대변하는 ‘로’에게서 헌법이 부여했던 ‘임신중단(낙태)권’을 빼앗았다.

박구용 전남대·광주시민자유대학 교수

박구용 전남대·광주시민자유대학 교수

‘로 대 웨이드(Roe et Wade)’는 임신중단권을 임신부에게 부여한 1973년 판결의 명칭이다. ‘로’는 텍사스의 임신중단금지법에 위헌소송을 제기한 여성의 가성이고, 웨이드는 소송 대상 검사의 진성이다. 이때부터 ‘로’는 이름 없는 여성의 이름이 되었다.

감염과 합병증으로 건강과 생명을 잃은 여성들, 계획되지 않은 임신으로 생계수단을 잃은 여성들, 생명체를 품은 채 버려진 여성들, 비난과 절망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성들은 모두 ‘로’이다. 죽거나 말거나 이제 여기저기서 ‘로’의 배를 향한 발차기가 이어질 것이다.

영국에서도 생뚱맞은 발차기가 있었다. 윔블던 테니스 대회 조직위 짓이다. 우크라이나 침공을 이유로 다닐 메드베데프를 비롯해 최고의 기량을 갖춘 러시아와 벨라루스 선수들의 출전을 금지한 것이다. 정부와 권력자가 져야 할 책임을 개인에게 묻는 윔블던의 결정은 전형적인 국가폭력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독재자 푸틴의 침공으로 시작되었다. 전쟁 초반 서방은 ‘푸틴이 미쳤다’는 말로 전쟁을 설명하곤 했다. ‘미친 푸틴’에 맞선 정상국가들의 연합으로 전쟁이 조기에 끝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시간은 점점 ‘미친 푸틴’ 쪽으로 흐른다. 이해와 이익을 따지며 적지 않은 국가들이 ‘미친 푸틴’ 편에서 거래를 한다. 약삭빠른 지식인들 말처럼 세계화, 세계주의가 끝난 것일까?

우크라이나 무력 전쟁은 이념 전쟁이 아니라 패권 전쟁이다. 이 전쟁은 미·중 무역갈등, 곧 무역전쟁에서 발화되었다. 트럼프가 유발한 무역전쟁은 아직 진행형이다. 오히려 바이든이 민주주의 수호를 명분으로 확전을 꾀했다. 그렇게 고약한 상황에 빠진 무역전쟁을 푸틴은 무력전쟁으로 전환시킨다.

‘미친 푸틴’은 갑자기 ‘악마 푸틴’으로 바뀐다. 미국과 나토는 우크라이나 방어에서 러시아 패배와 푸틴 퇴출로 전략을 수정한다. 미국의 나팔수가 된 주류 언론들은 타협, 화해, 평화 서사를 버리고 보복, 응징, 승리로 가는 전쟁 서사를 택한다. 이 서사에서 ‘악마 푸틴’의 응징에 동참하지 않는 나라는 모두 전체주의 혐의를 받는다. 중국과 러시아의 전체주의에 맞서 민주주의 동맹을 강화해야만 한다는 담론의 최초 설계자는 바이든이다.

바이든은 집권 초기부터 민주주의 동맹을 주창했다. 트럼프로 상징되는 반민주 체계로의 세계적 퇴행을 차단하기 위해 ‘범세계, 범민주 세력의 연대’를 지향한 기획으로 보였다. 그래서 나는 지난해 12월 바이든이 만든 제1회 세계 민주주의 정상회의에서 한반도 종전선언이 있길 바랐다. 순진하고 어리석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에 바이든의 제안은 아무런 국제적 호응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무역전쟁이 무력전쟁으로 바뀌면서 바이든의 동맹제안은 준엄한 명령이 되었다.

대부분의 나라, 특히 우리는 미국이 주도하는 민주주의 동맹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 다만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위해 참여해야 한다. 블록화와 전쟁을 불사하는 동맹이 아니라 세계화와 평화를 키우는 동맹이 되도록 균형추의 역할을 수행하는 참가자여야 한다. 우선 민주주의 동맹과 나토를 동일시해선 안 된다. 전자가 평화를 내세우는 가치동맹이라면 후자는 전쟁도 불사하는 특수기구이다. 국가의 미래는 아랑곳하지 않고 불러준다고 따라갈 곳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주권과 인권을 동등하게 존중하는 정치체계다. 주권을 내세워 인권을 말살하거나 인권을 보호한다며 주권을 침해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런데 정작 민주주의 동맹을 주도하고 있는 두 나라에서 이 균형이 깨지고 있다. ‘로’를 추방한 미국과 선수 개인의 인권을 침해한 영국의 결정은 비민주적이다. 더구나 세계화에서 블록화로의 역주행은 보편적 가치로서 민주주의의 심각한 훼손이다.

전체주의만이 아니라 민주주의 체계의 상층부조차 다른 사람의 건강과 생명, 그리고 미래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을 서슴없이 할까? 미지의 생명과 주권을 내세워 날 생명과 인권을 위협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도덕은 원한감정에 사로잡힌 노예 도덕일 뿐이다. 타인의 몸과 삶에 저주를 퍼부을 수 있는 것은 그저 단순한 복수심 때문이다. 남들이 세운 복수의 칼날 위에 서 춤을 추는 대통령 부부, 국민은 죽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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