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행적 정부와 한국형 민주공화제

김종철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취임한 지 세 달도 못 되어 새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이 20%대로 떨어졌다. 진영을 넘어 그 원인을 둘러싼 열띤 논란에 국민들의 시름이 깊다. 그 와중에 새 정부의 위기를 대통령 개인의 책임을 넘어 대통령제 정부형태 탓으로 돌리는 목소리도 새삼 꿈틀거린다. 하지만 무능한 대통령의 실정에도 불구하고 국정의 중심을 잡아줄 다양한 헌정시스템이 작용하는 한국형 민주공화제가 진화해온 역사가 우리 민주화의 과정임을 환기해 볼 필요가 있다.

김종철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김종철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무엇보다 근현대사의 결정적인 시기마다 선거에서, 광장에서, 그리고 이제 생활현장에서까지 참정권, 표현의 자유, 노동권 등 다양한 기본권으로 무장하고 투표로, 구호로, SNS로, 소송으로 민주공화제를 지켜온 것은 주권자 국민이었다. 대한국민들이 산업화와 민주화의 병행발전을 달성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다이내믹 코리아를 구현함으로써 대만과 더불어 동아시아의 선도적 민주공화체제를 떠받치고 있다. 일당독재체제에 터 잡은 인민공화국의 정체성을 더욱 강화하고 있는 중국이나 1.5당 선거독재를 구조화한 일본과는 달리 정치의 역동성이 살아 있는 것이다.

진흙탕 대선의 근소한 득표 차이에도 불구하고 새 정부에 그래도 과반의 국민들이 기대를 모아준 것은 국민 중심의 민주공화체제를 한 단계 더 도약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길 염원하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맹목적 진영주의자들을 제외하고 대다수가 지지를 철회하고 있는 것은 정치보복을 대통령 놀잇감으로나 여기는 듯 민주공화제에 반하는 검경직할체제를 위헌·불법 시비에도 불구하고 밀어붙이는 이율배반적 행태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다. 제왕적 대통령의 폐습을 끊는다면서 헌법과 법률을 위반한 시행령 체제로 법무장관의 인사검증권이나 행안부 장관의 경찰통제권을 부여한 것은 그나마 뜻있는 국민들의 지지를 뒷받침하던 ‘공정과 상식에 입각한 법치’의 슬로건이 오히려 검찰조직 이기주의와 정권쟁취를 위한 도구에 불과했음을 스스로 증명하여 새 정부에 대한 신뢰를 갉아먹는 대표적 사례가 되었다.

탄핵의 오명을 안은 박근혜 대통령이 집권당 원내대표를 내쳤던 사건을 연상시키듯 당대표 찍어내기를 불사하면서 여전히 대통령바라기의 시대착오적 고질병을 보여주는 집권여당의 무책임한 행태가 국민의 분노를 자아낸다. 전방위적 정치보복을 위한 검경직할체제의 헛발질이 우려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국민의 공감을 얻지 못하는 권력의 덧없이 짧은 숙명은 근래까지의 민주화 역사가 생생히 증거하고 있다. 도구화된 법치를 빌미로 굴종을 강요하는 칼바람을 일으킬 수는 있으나 동아시아의 민주화를 선도해온 대한국민의 집단지성이 이끄는 민주화의 거대한 흐름에 비추어 찰나의 미동에 그칠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될 것이다. 군-정보기관-경찰-검찰로 이어져온 권력기관에 의존한 절대 권력의 시대는 국민을 정점으로 한 대한민국의 헌정시스템의 자정능력을 거스를 수 없기 때문이다.

민주화의 전환기에 돌출된 퇴행적 정부의 출몰이라는 배경에서 볼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헌법수호기관인 헌재와 법원의 역할이다. 사법권력이야말로 주권자 국민과 더불어 퇴행적 정부의 준동으로부터 다원적 사회가 공존·공생·공영할 수 있는 토대가 되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수호할 보루인 것이다. 새 정부에 대한 국민의 커가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민주공화제의 토대를 공고하게 하는 중요한 판결들은 희망의 씨앗이 된다. 양심적 병역거부와 임신중단권 인정 사건이나 잇따른 노동사건에서 개인의 기본적 인권을 존중하는 전향적 판결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헌재는 최근 오프라인 선거운동을 규제하는 공직선거법 조항들에 대하여 무더기로 위헌결정을 내림으로써 민주화 이후에도 더디게 진행되던 선거의 자유화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선거연령을 18세로, 정당연령을 16세로 하향하는 개혁입법과 더불어 정치과정에서 국민을 수동적 지위에 머무르게 강요하는 법적 규제가 완화되고 주권자의 정치적 영향력이 더욱 신장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권력기관에 의존하는 퇴행적 정부는 주권자의 능동성을 억압하고 탈정치·반정치라는, 민주공화제에 독이 되는 정치문화와 정치제도를 숙주로 삼는다. 이렇듯 사법권력과 입법권력이 국민의 주권을 강화시키는 정치개혁적 역할을 지속함으로써 민주공화제를 한 단계 더 상향시키기 위한 전향적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한 퇴행적 정부에 의해 일시적으로 도구화되어 왜곡된 법치의 장치들은 머지않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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