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직한 절망이다

엄치용 미국 코넬대 연구원

올여름의 높은 습도와 무더위를 서울에서 맞았다. 도시의 짙은 녹음이 절정에 이르자 매미의 높은 음이 짧게 하늘을 가로질렀다. 생의 전주곡을 마친 그들이 나무에서 수직 낙하했다. 매미의 죽음을 지켜본 내게 그들이 말한다. 기다려온 시간이 허무하다 말하지 마라. 길바닥에 버려진 내 주검에 행여 동정하려거든 아서라. 난 긴 세월을 흙 속에서 보냈다. 바람이 지나가 가려움을 긁어 주었고, 여름 소나기가 갈증을 덜어 주었다. 눈 덮인 바닥의 온기를 느끼며 살았다. 기나긴 내 삶이 오늘처럼 바닥에 누울 때 난 다시 살아난다.

엄치용 미국 코넬대 연구원

엄치용 미국 코넬대 연구원

박노해 시인의 ‘길이 끝나면’이라는 시가 떠올랐다. 시인은 말한다. 길이 끝나면 새로운 길이 열리고, 겨울이 깊으면 새봄이 걸어 나온다 했다. 내가 무너지면 더 큰 내가 일어서고, 정직한 절망이 희망의 시작이라고 했다. 한 마리 매미의 죽음은 절망처럼 보였지만, 매미 집단 영속성을 위한 희망임을 깨달았다.

20%대 윤석열 대통령 지지율에 대한 대통령실의 답변은 “혹시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을 채워나가도록 하겠다”라는 답변이었다. 이 정도의 지지율에도 ‘혹시 부족한 부분’이라는 인식이 놀라웠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그들에겐 정직한 절망이 보이지 않았다. 고강도 인사 쇄신 1순위가 대통령실인 이유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한 대통령의 첫 마디는 “국민 뜻을 세심하게 살피고 늘 초심을 지키면서 국민 뜻을 잘 받드는 것”이었다. 이 정도 말로 배반한 민심은 돌아오지 않는다. 국민 뜻은 이미 전달했다. 검찰 만능주의 탈피, 분별없는 인사원칙 철폐, 그리고 대통령 배우자를 둘러싼 온갖 잡음을 정리하고, 불통과 아집의 대통령 이미지에서 벗어나 야당과의 협치를 통한 올바른 국정운영을 당부하는 것이다. 총론 말고, 구체적 언어와 행동을 보여달라는 요구다.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윤석열 정치의 답을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책에서 찾는다. 호랑 애벌레는 자기가 태어난 곳인 초록색 나뭇잎을 먹고 무럭무럭 자란다. 27년 검사 밥을 먹은 윤석열은 검찰총장으로 성장한다. 새로움을 찾아 나무에서 내려온 호랑 애벌레는 애벌레들이 바삐 움직이는 거대한 기둥 속으로 파고든다. 검찰총장을 사임한 그는 서로를 짓밟고 올라가는 정치 기둥에 올라탄다. 윤석열의 이야기 펼침은 현재 여기까지다. 책은 계속 대통령 윤석열에게 나머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노랑 애벌레를 만난 호랑 애벌레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어야 오르는 기둥을 내려온다. 위로 올라가는 일을 포기하는 건 어려운 결단이라 말한다. 여론을 개의치 않겠다는 대통령의 말은 많은 국민에게 상처를 주었다. 국민만 보고 가겠다는 국민의 실체는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애벌레가 전해주는 메시지는 불통과 자만의 기둥에서 내려오라 말한다.

노랑 애벌레는 누에고치를 만들고 있는 다른 애벌레를 만난다. 곤경에 빠져 보였던 애벌레는 나비 이야기를 들려주고 이렇게 말한다. “날기를 간절히 원해야 해. 하나의 애벌레로 사는 걸 기꺼이 포기할 만큼 간절하게.” 간절히 국민 받들기를 원한다면 검사로 살아왔던 자신의 과거와 결별해야 한다. 누에고치 속에서 자신을 탈바꿈하고 측근에 검사가 아닌 국민이 보이는 새로운 나비로 나와야 한다.

책의 이야기는 결말로 접어든다. “네가 나비가 되면 너는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어. 새로운 생명을 만드는 사랑 말이다.” 늙은 애벌레는 마지막 남은 실로 머리를 감싸며 외친다. “너는 이름다운 나비가 될 수 있어. 우리는 모두 너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선거가 끝난 뒤 한참 지났다. 누구를 지지했건 지금 대통령은 윤석열이다. 그가 아름다운 나비로 변신해야만 국민이 모두 나비가 되는 행복한 꿈을 꿀 수 있다.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정직한 절망부터 시작해보자. 무엇이 문제였던가? 카프카의 변신은 끔찍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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