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희령 소설가·번역가

곳곳에 그림자 없는 사람들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외계인이거나 정교한 홀로그램일 거라는 추측, 제약회사 실험실에서 만든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이라는 음모론까지 다양한 설이 단톡방과 채팅창을 달궜다. 이상 기후로 인한 현상이라는 설도 있었다. 한반도에는 무더위와 폭우가 여러 달 지속되는 중이었다. 욕실에서는 비누가, 부엌에서는 설탕이 녹아내렸다. 뜨듯한 어항 속 같은 거리를 오래 걸으면, 사람의 그림자도 녹아서 흘러가 버린다는 것이다. 길 바로 옆에서 입을 열고 기다리고 있는 하수구 속으로.

부희령 소설가·번역가

부희령 소설가·번역가

아트페어 행사장이 오픈하기 바로 전날이었다. 가벽과 조명 설치가 끝났고 각 화랑에서 나와 그림을 걸었다. 도면대로 만든 부스이지만, 수정 보완 요구는 늘 있었다. 여기저기 불려 다니다가 밥때를 놓치는 것은 각오해야 했다.

조명 문제가 있다는 부스로 호출되었다. 운두가 높은 액자프레임 때문에 조명을 켜면 작품에 그림자가 생겼다. 작품 상단에 좁고 반듯한 직사각형의 그늘이 만들어졌다. 사다리 위에 올라가 조명의 각도를 이리저리 조절하고 있었다.

“그림자가 남아 있다니, 아직 탁월함에는 이르지 못했군.”

언제 나타났는지 알 수 없는 남자가 그림 앞에 서 있었다. 흰 셔츠를 입은 남자는 사다리를 붙들고 서 있는 팀장에게 반색하며 손을 내밀었다.

“저 알죠? K 미대.”

“사람 잘못 보신 거 같은데요.” 팀장은 외면했다.

사다리에서 내려오면서 생각했다. 미대? 노가다로 일하는 이들은 의외로 전직이 다양하다. 전직 복서, 전직 촬영감독, 현직 희곡작가1)를 만나보았다. 전직 화가도 있을 법했다.

“아까 흰 셔츠 입은 남자, 그림자가 없었어요. 그게… 전염병 같은 건 아니겠죠?”

“그림자 그려주는 일을 한 적이 있었어. 다들 사라진 그림자에 대해 거짓말을 하던 시절이었지. 러시아로 여행 갔다가 너무 지독한 추위에 그림자가 바닥에 얼어붙어서 떨어져 나갔다고도 하고, 또 힘이 엄청난 사람이 그림자를 짓밟아서 구멍을 내버렸다고도 하고.”2)

“누가 그걸 믿을까요?”

“그림자를 몸에서 떼어내려면 금화가 끝없이 나오는 주머니라든가 투명 인간이 되는 모자 같은 것에 대한 강렬한 욕망이 있어야 해. 요즘은 그림자를 돈이나 권력에 팔았다는 걸 굳이 숨기는 사람은 없어. 가짜 그림자를 그려 달라는 사람도 없고. 이제는 가난이 덧없는 사물들과 거리를 두는 가치 있는 태도가3) 아니라 수치일 따름이니까.”

“금화 주머니라니 100억쯤 들어 있는 예금 통장 같은 게 떠오르네요. 그런데 투명 인간은?”

팀장은 과장된 몸짓으로 행사장 안을 둘러보았다.

“이 안에 설치된 CCTV며 주머니 속에 있는 스마트폰을 생각해 봐. 우리의 말과 행동을 지켜보는 존재는 어디에나, 늘, 있어.”

“그림자 말고 다른 그림은 그린 적 없어요?”

“누구 말마따나 탁월함이 부족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자기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뿐이야.4) 어떤 것들은 내 자리에서 너무 멀리 있었어. 그림자의 무게만큼.”

그림자의 무게라니. 그림자는 몸에 붙어 다니면서 몸의 자리를 표시해주는 무엇, 몸과 닮아 있고 몸을 흉내내지만, 몸의 고유한 표정을 모두 지워버린 무엇이다.5) 새삼 행사장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을 유심히 보았다. 그림자가 있는 사람은 모두 회색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작업복 탓인지 사람인지 그림자인지 구별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그들에게 무게가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히 보였다.

늦은 밤 행사장을 돌다가 작품 설명을 하는 작가의 영상이 떠 있는 모니터 앞을 지나쳤다. 영상을 흘낏 보면서 나는 팀장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떤 것들은 내 자리에서 너무 멀리 있고, 그들에게는 그림자가 없다.

1)이야기의 원본을 제공한 김원 2) <그림자를 판 사나이>,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 3) <그림자 노동>, 이반 일리치 4), 5) <사람, 장소, 환대>, 김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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