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도와 130년 전 테니스장읽음

이광표 서원대 교수
거문도 영국군 테니스장 흔적.

거문도 영국군 테니스장 흔적.

여수에서 115㎞, 제주도에서 110㎞. 남해안과 제주도의 거의 중간에 위치한 섬. 거문도 하면, 사람들은 무엇을 떠올릴까. 남해안에서 가장 오래된 등대인 거문도 등대(1905), 등대로 이어지는 멋진 동백터널과 해안 풍경, 거문도와 백도를 오가는 유람선, 은갈치와 해풍 쑥, 지금은 사라진 거문도 파시(波市)…. 저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영국군의 거문도 점령을 떠올리는 이가 가장 많을 것이다.

이광표 서원대 교수

이광표 서원대 교수

1885년 4월 영국군은 거문도를 불법 점령했다.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서였다. 당시 함선 3척과 영군 해군 617명이 거문도에 상륙했다. 무단 점령은 22개월간 계속되었다. “(22개월 동안) 수십 척의 군함과 상선을 통해 군인뿐 아니라 언론인까지 연인원 오륙천 명의 영국인들이 거문도를 거쳐간 것으로 추산된다. … 생필품은 홍콩, 상하이, 나가사키에서 보급되었다. … 영국군은 나가사키에서 소를 수입하여 사육한 뒤 …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연극과 뮤지컬을 상연하고, 나가사키에서 오는 순회도서관에서 소설을 빌려 읽고 … 장교들은 테니스장을 만들어 테니스를 즐기고, 민첩한 개를 데리고 메추라기 사냥에 나서고, 중국에서 꿩을 수입하여 번식시킨 뒤 사냥하는 게임클럽을 만들기도 했다.”(이영호, ‘거문도가 경험한 제국주의와 근대’, <도서문화> 48집) 주권국가의 영토를 무단 점유한 영국군의 일상이 저리도 여유로울 수 있다니. 화가 나는 일이지만 19세기 말 한반도의 현실이었다.

그런데 영국이 거문도를 노린 것은 그보다 한참 전인 1845년부터였다. 당시 영국 군함 사마랑호는 싱가포르, 필리핀 해역과 류큐를 탐사한 뒤 제주도를 거쳐 거문도에 상륙해 조사를 했다. 거문도 주민들과 접촉하고 필담을 나누었으며 함장은 거문도를 ‘Port Hamilton’이라 이름 붙였다. 그때 이미 거문도를 전략적 요충지로 판단했고 1855, 1859, 1863년에도 거문도를 탐사했다. 거문도 주민들이 자신들에게 우호적일 것으로 보고 치밀하게 점령을 준비해온 것이다. 그 무렵 러시아와 미국도 거문도를 여러 차례 조사했고 미국 해군장교는 아시아함대 사령관에게 거문도를 점령할 것을 수차례 건의하기도 했다. 거문도의 근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거문도가 최근 문화재청의 근대역사문화공간 활성화 사업 대상지로 선정되었다. 거문도 내항 주변의 근대 흔적을 어떻게 연구·조사하고 보수·복원·활용할 것인지 구체적이고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될 것이다. 그런데 거문도 점령 사건이 그렇게 단순해 보이진 않는다. 침략이었지만 당시 거문도 주민들은 영국군에 우호적이었다. 이를 두고, ‘중앙정부에서 소외되었던 거문도 주민들이 생존권 차원에서 영국 해군을 이용하려 했다’는 견해도 있다. 영국군은 40년 동안의 조사를 토대로 이런 상황을 절묘하게 이용한 것이다. 거문도 지역 근대 경험의 특수성이었다.

거문도에는 현재 영국군 묘지가 있고 테니스장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 흔적만으로는 거문도 점령의 전모를 제대로 기억할 수 없을 것 같다. 거문도 근대의 특수성을 고려한 입체적이고 다층적인 기억이 필요하지 않을까. 다행스럽게 최근 들어 연구 성과가 축적되고 사진자료 등이 공개되고 있다. 이런 성과들이 근대역사문화공간 프로젝트에 잘 수용되길 기대해본다.

거문도의 시간은 뭍에 비해 느리게 흘러왔다. 그렇기에 다른 지역보다 근대의 흔적이 곳곳에 더 깊게 남아 있다. 얼마 전 지인들과 거문도를 찾았을 때 만난 한 주민의 말이 떠오른다. 거문도 파시에 관한 추억이었다. “1970년대까지 파시가 성황일 때는 돈이 하도 넘쳐나 500원짜리 지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지요. 이순신 장군 얼굴 그려진 500원짜리는 그냥 개들이 입에 물고 다녔어요.”

거문도로 5호 태풍 송다가 몰려오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은 행복했다. 이러한 기억도 거문도 근대 풍경의 하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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