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해력 부족에 혀만 찰 일인가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위원

며칠 전 SNS에서는 ‘심심함’이 논란이었다. 한 업체에서 행사 진행을 잘못한 탓인지 사과문을 올렸는데, 여기에 ‘심심한 사과’라는 표현을 쓴 게 발단이다. 사과문을 읽은 누군가들이 화를 냈다. “심심하다고? 난 하나도 안 심심한데.” 그렇다. ‘심심하다’는 말에 다른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몰라 사달이 난 거다. 명징, 직조, 사흘, 금일, 무운이 먼저 자리잡고 있는 명예의 전당에 ‘심심’이 새로 등극한 순간이다.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위원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위원

곧장 문해력 문제가 제기됐다. 한자교육 부재, 독서량 부족 문제도 당연히 언급됐다. 그다음이 흥미로운데, 지적받은 사람들이 도리어 역정을 냈다. 왜 어려운 말 써서 혼란을 만드냐, 뜻은 알지만 비꼬려고 그런 거다, 물타기하지 말아라…. 상황이 이쯤 되면 반지성주의 문제도 언급된다. 최근 몇 년간 발생한 문해력 논란은 항상 이런 패턴이었다. 대체로 SNS 안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이만큼 반복되면 확실히 사회적 현상이다.

이런 상황에 문해력 지적이 나오는 건 당연하다. 기본적으로 어떤 단어를 모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수준이라고 믿어온 어휘들이 다른 누군가들에게 ‘있어 보이려고 어렵게 쓴’ 어휘로 받아들여질 때,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이 무너지면서 이 상황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것이 샘솟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해력 회복을 위한 교육을 고민하든 새로운 시대의 문해력 담론을 제안하든 이 문제가 사회적 차원에서 논의돼야 함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정말 문해력만으로 이 상황을 완벽하게 설명해낼 수 있을까. 나는 한자를 배우며 자랐고 책도 더러 읽지만, ‘심심하다’라는 말이 정확히 ‘깊고 간절하다’라는 의미인지는 솔직히 이번에 처음 알았다. 다만 ‘심심한 사과’가 ‘지루하고 재미없는 사과’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이해했을 뿐인데, 그 표현이 공적 상황에서 흔히 쓰인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예컨대 정치인이 대국민 사과를 하면서 ‘지루하고 재미없이’ 전할 이유가 없으니까. 어떤 단어의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해도 상황과 맥락상 그 뜻을 유추해내는 일은 이렇게 충분히 가능하다.

오늘날 정말로 무너진 것이 있다면 어쩌면 그 유추의 ‘가능성’일지도 모르겠다. 그 가능성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에서 신뢰의 문제가 나온다. 상대방의 선의를 신뢰하지 않거나 어느 정도 상식적일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번 논란을 예로 들면, 업체가 일부러 고객을 조롱할 이유가 없다고 믿을 때 ‘심심하다’라는 말이 ‘지루하고 재미없다’는 의미가 아닐 수도 있다는 유추의 가능성이 열린다. 그러나 그조차 신뢰하지 못할 때, 즉 업체가 고객을 조롱할 수도 있다고 여길 때에만 ‘심심하다’는 곧장 ‘지루하고 재미없다’는 의미로 수용될 수 있는 것이다.

지적에 역정을 내는 풍경도 그렇다. 그들은 왜 역정 내는가? 잘못을 인정했을 때 어떤 종류의 환대가 돌아올 것이라고 믿지 않기 때문은 아닌가. 인정하든 않든 상대방이 나를 조롱할 것이라면 저자세보다는 ‘일단 우겨보는’ 고자세가 전술적으로 현명하다는 판단. SNS 공간에서 그런 판단은 옳은 측면이 있다. 서로를 신뢰하며 이뤄지는 건강한 토론보다는 상대방을 무릎 꿇리기 위한 공격만이 횡행하는 것이 사실이니까. 결국 신뢰의 문제다.

이것이 사회적 신뢰 부족의 문제라면 단순히 개인에게 따져물을 일도 아니다. 어떤 단어를 모르는 사람들을 보면서 마냥 혀만 찰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앞으로 그와 같은 이들이 점차 다수가 될 것이고 어쨌거나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면, 지금 소통을 가로막는 조건들을 어떻게 바꿔낼지를 고민하는 게 훨씬 필요하고 유익하다. 물론 그런 고민도 ‘상황 또는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니, 이 또한 신뢰의 문제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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