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 없이 ‘선진국’ 없다

황규관 시인

쌀값 폭락에 성난 농민들이 논을 갈아엎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계속되는 금리 인상으로 고환율에 고물가가 계속 밀려오는데 유독 쌀값만 떨어진 것이다. 전라남도에 따르면, 20㎏ 기준 작년에 5만3534원이던 것이 올해 6월에는 4만5534원이라고 한다. 15% 가까이 폭락한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현 정부와 여당은, 쌀의 생산과 가격이 일정 비율을 넘어서거나 떨어지면 한시적으로 쌀을 시장으로부터 격리해 정부가 의무적으로 구매하게 하는 더불어민주당의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노골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도리어 쌀을 정부가 의무적으로 구매하게 되면 쌀 농가들이 농사를 포기하지 않아 공급 과잉이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해괴한 발언도 서슴없이 하고 있다. 이런 말은 사실 농민에 대한 무례이면서 농업에 대한 노골적인 천시이다.

황규관 시인

황규관 시인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갈수록 고사하고 있는 농업과 농촌을 얼마나 살릴 수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야말로 혁명적인 농업정책이 나오지 않는 한 농업과 농촌은 백척간두에 걸쳐 있는 나머지 한 발마저 디딜 곳을 잃어버릴 게 뻔하다. 이른바 ‘근대화’는 농업과 농촌의 소외를 넘은 수탈의 역사였다. 이는 자본주의 축적의 시초가 착취가 아니라 수탈인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구소련의 공업화도 결국 우크라이나 등 농촌 지역과 거기에 사는 농민의 수탈을 통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 바탕 위에서 신기루 같은 대도시가 성립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신기루를 만들고 그 신기루 안에서 자기 권력을 유지하는 이들이 언제나 말해온 게 수요와 공급 법칙을 근간으로 한다는 시장 질서이다.

쌀값 폭락이 농민 탓이라는 정부

하지만 시장 질서라는 것이 공급과 수요를 스스로 조절하면서 안정화를 꾀한다는 생각은 일종의 시장신비주의이다. 자본주의 시장은 그 태생부터가 안정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장기간에 걸쳐 되풀이되는 경기 침체와 회복의 평균값이 안정적인 시장 질서로 보이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러는 동안 가난하고 힘없는 사회적 약자들이 숱하게 극단으로 몰렸다. 지금의 고금리와 고환율도 결국 자본 시장의 거침없는 유동과 관계 있지 않은가? 이 와중에 부를 쌓아 올린 이는 누구이고, 삶이 극단으로 몰리고 있는 이들은 누구일까.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연이어 금리를 올리는 것은, 그 고의성과는 상관없이 자국의 인플레를 다른 나라로 떠넘기는 일이라는 것도 제법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자본주의 시장의 진실은 모른 척하면서 고작 수요 대비 공급의 과잉이 쌀값 폭락의 이유라는 피상적인 판단은 쌀농사를 짓는 농민들을 업신여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정작 그동안 쌀값이 오르면 쌀을 수입해 시장 가격을 강제로 조정한 것은 대한민국 정부‘들’이었다. 작년에도 4만3000여t, 쌀값이 폭락하고 있던 와중인 올해에도 지난 8월까지 1만7000여t의 수입쌀을 시장에 풀었다. 그러면서 책임을 농민에게 떠넘기는 것은, 자기 입으로 들어가는 밥에 스스로 침을 뱉는 행위와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쌀 시장격리 의무화를 시행하면 공급 과잉이 상시적으로 일어난다는 망언을 서슴지 않는 것은, 결국 현 쌀값 폭락이 전적으로 농민 탓이라는 것이며, 정부는 앞으로도 그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해, 기후위기로 대두되는 식량 문제에 대해 아무 관심도 계획도 없다는 뜻일 게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당장의 경제성장뿐이니까. 내일 일은 ‘내가 알 게 뭐야!’니까.

도리어 시장격리 의무화를 쌀에만 국한하지 말고, 다른 농산물에 확대 적용하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민주당에서 말하고 있는 수입쌀의 공적개발원조로의 전환을 국내산 모든 농작물에 검토하는 것 말이다. 즉 만약 농산물의 공급 과잉 사태가 벌어지면 그것을 북한을 포함한 다른 가난한 나라와 조건 없이 나누는 방식이다. 이러한 국가 간 호혜 행위는 대통령의 저급한 막말보다 훨씬 더 ‘국격’을 높이는 일이 될 것이며, 말로만 하는 ‘선진국’ 타령보다 더 실질적인 ‘선진국’이 되는 묘책이 될 수도 있다.

고통 깔보는 권력층 때문에 암울

기후위기 시대가 도래하자 농업도 그 주범이라는 이런저런 통계와 주장이 나오지만, 그렇다 해도 그것은 농업을 ‘산업화’로 몰고 간 그간의 수탈적 농정 때문이지 농업 자체가 기후위기를 초래했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이다. 설령 농업에서 배출하는 이산화탄소량이 적지 않다 하더라도, 예를 들어 반도체와 철강 산업만 할까. 첨단 산업이 우리에게 물질적 풍요와 편리를 준 것은 사실이나 그만큼 관계와 존재의 풍요를 파괴한 것도 사실이다. 관계와 존재의 풍요에 있어, 땀 흘려 땅을 일구고 그 수확물을 거둬보는 일만 한 게 없다. 그 고통과 기쁨을 깔보는 이들이 권력을 독차지하고 있는 한 우리의 미래는 없다고 봐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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