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와 증오의 블랙홀을 넘어서읽음

[강준만의 화이부동] 분노와 증오의 블랙홀을 넘어서

“국민의힘이 특정언론사 사진기자의 실명을 거론하고 관련법규까지 예시하며 응분의 조치를 하겠다고 한 것은 언론과 기자에 대한 겁박과 다르지 않으며 언론의 취재활동을 위축시키고 국민의 알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이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국회 사진기자단이 지난 9월21일 발표한 성명서다. 국민의힘 미디어국이 전날 “정진석 비대위원장과 유상범 의원의 오래전 대화를 마치 오늘 대화한 내용처럼 보도한 ‘노컷뉴스’ 아무개 기자의 보도는 명예훼손과 업무방해, 정보통신망법 위반에 해당한다”며 “정확한 사실관계 확인 없이 허위의 내용이 보도된 데 대해 강한 유감을 표시하며 곧 응분의 조치를 취할 예정”이라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낸 것에 대한 대응이었다.

다음날인 22일엔 한국기자협회가 “알아서 움직이는 검찰, 이대로 괜찮은가?”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했다. 대선 정국이던 작년 10월27일 ‘윤석열 대통령 40년지기’ 황하영씨(당시 동부산업 대표)를 만나러 동해 사무실을 방문했던 UPI뉴스 기자 두 명을 검찰이 거의 1년이 다 돼가는 시점에서 ‘공동주거침입죄’를 적용해 기소한 것에 대한 대응이었다. 성명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렇게 알아서 눈치껏 움직이는 검찰이 득세할수록 대한민국 언론자유지수는 추락할 수밖에 없다. 이는 대통령이 바라는 바도 아닐 것이다. 국정운영에 부담만 준다는 것을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데 검찰만 모르고 있다는 것이 개탄스러울 뿐이다. 이번 사건은 UPI뉴스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기자협회는 이번 사건을 언론탄압으로 규정하고, 향후 언론활동을 위축시키는 검찰과 정권의 움직임에 단호히 대응할 것이다.”

비교적 작은 사건일망정 나는 이 두 사건을 보면서 “이게 이렇게까지 갈 일인가?”라는 의아심을 떨치기 어려웠다. 불신과 반감, 그리고 분노와 증오가 폭발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살벌한 풍경과 무관치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때마침 나는 최근 번역·출간된 미국 언론인 아만다 리플리의 <극한 갈등: 분노와 증오의 블랙홀에서 살아남는 법>이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물고기가 물의 존재를 느낄 수 없듯이, 분노와 증오의 블랙홀에 빠진 사람들은 그걸 깨닫기 어렵다. 그러니 비슷한 처지의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차는 게 그런 깨달음을 갖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겠다.

“너 딱 걸렸어” 전 사회적 성행

리플리는 미국 사회가 휩쓸려 들어간 분노와 증오의 블랙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민주당 지지자와 공화당 지지자의 절반은 상대측이 뭔가를 잘 모른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아예 무섭다고까지 느꼈다. 미국인은 그동안 수많은 정치적 사안에 합의를 이뤄냈으면서도 정치 성향에 따라 상대 진영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들’은 200여년 후에 벌어질 그런 미래를 내다보았던가 보다. 초대에서 4대에 이르는 대통령들(조지 워싱턴, 존 애덤스,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은 모두 정당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했다. 애덤스는 “정당은 정치에서 가장 심각한 악이다”라고 했고, 제퍼슨은 “정당에 대한 충성은 자유롭고 도덕적인 인물이 처할 수 있는 가장 타락한 상태다”고 했다.

그럼에도 이렇다 할 다른 대안이 없어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정당 정치를 하게 되었지만, 이들이 가장 우려한 건 인간의 부족주의 본능이었다. 매디슨은 “다수건 소수건, 타인의 권리와 공동체 전체의 영속적인 이해에 반하는 공동의 열정이나 이익을 기반으로 시민들이 뭉치게 되는 사태”를 우려했는데, 이 우려는 해소되지 않은 채 오늘날까지 미국 정치를 괴롭히는 고질병이 되었다.

미국의 대통령제를 그 원흉으로 지목할 수도 있겠지만, 정도의 차이일 뿐 미국만 그런 것도 아니다. 독일 대통령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는 2018년 한 대담 행사에서 독일 사회가 처한 현실에 대해 이렇게 개탄했다.

“우리는 지금 영구적인 분노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사회 전체가 격노 상태입니다. 독일에는 더 이상 대화가 없습니다. 대신 큰소리와 고함만 남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극한 갈등 상황에 대해 정치인의 책임을 묻지만, 오히려 기술의 책임을 묻는 게 더 나은 답일 수 있다. 다음 주장을 감상해보시라. “집단 간의 경쟁의식과 증오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새로운 일은 기술의 발달로 이런 집단들이 서로 너무나 가까워져서 도저히 편히 지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인류는 이런 정신적, 도덕적 근접상황에 어떻게 적응해야 할지를 아직 배우지 못했다.”

오늘날의 디지털 혁명을 두고 한 말 같지만, 실은 약 70년 전 미국 심리학자 고든 올포트가 한 말이다. 인류는 70년 전의 기술 발달로 인한 문제에 대해선 적응법을 배웠지만 그 시절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새로운 기술이 가져온 심대한 변화엔 아직 적응하지 못한 채 질질 끌려다니고 있다. 리플리는 무엇보다도 소셜미디어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소셜미디어의 가장 큰 위험은 그것이 갈등을 격화시킨다는 것이다. 소셜미디어는 원래 우리에게 즉각적인 반응을 부추기고 시간과 공간을 앗아가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소셜미디어는 자동화기와 같다. 따로 장전할 필요도 없으므로 가까운 사람들이 나를 제지하거나 제정신을 차리도록 도와줄 새도 없이 일이 저질러진다.”

기존 미디어와 전통적 언론은 그렇게 저질러지는 자동화기의 난사에 굴복해 그걸 일용할 양식과 같은 콘텐츠로 애용하고 있고, 여론조사업체들은 휘발성이 강한 즉각적인 반응들을 행여 날아갈세라 수시로 ‘과학’의 이름을 앞세운 여론조사로 채집해 판매하느라 여념이 없다. 분노와 증오의 블랙홀에 생계를 의탁한 집단들이 많아지면서 우리는 모두 알게 모르게 그런 블랙홀을 만드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소신 유예하며 타협의 길로 나가야

그런 상황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게 이른바 ‘가차 저널리즘(gotcha journalism)’이다. 일명 “너 딱 걸렸어 저널리즘”이라고도 한다. 이는 언론이 주로 수익 증대를 위해 갈등과 스캔들에 초점을 맞춰 보도하려는 경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유명인의 실수나 해프닝을 꼬투리 삼아 집중적으로 반복 보도하는 행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이 ‘가차 저널리즘’이 실수가 잦은 독특한 유형의 대통령 부부를 만나면서 정치 저널리즘의 기본 모드로 승격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이다.

이미 ‘실수 많은 대통령 부부’라는 프레임이 강고하게 형성돼 있는지라 이 프레임에 편승하려는 정파적 시도가 왕성하게 이루어지면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대통령 부부 때리기’가 범국민적 유희로 소비되고 있다. 원인 제공자인 대통령 부부에게 모든 책임을 묻는 건 일견 타당하기도 하지만, 원래 ‘가차 저널리즘’도 그럴 만한 근거가 있어서 나오게 된 게 아니던가.

“너 딱 걸렸어”가 전 사회적 차원에서 성행하다 보면 딱 걸린 게 아님에도 딱 걸렸다고 주장함으로써 갈등을 극한으로 몰고 가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비극이 발생하곤 한다. 글 첫머리에 소개한 두 사건도 바로 그런 경우가 아닌가 싶다. 갈등을 빚는 양쪽이 소통과 타협의 가능성을 전면 부정하면서 자꾸 “너 딱 걸렸어”만 경쟁적으로 외치다보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두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좋겠다. 나는 국민의힘과 검찰 모두 어떻게 하는 게 정녕 윤석열 정권에게 더 도움이 되고, 사회 전체에 더 유익할지 고민하면서 슬기로운 판단을 내려주길 바란다.

정치학자 리 드러트먼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을 양자 구도로 보는 본능을 무너뜨리는 정치다”라며 “그것은 유연한 정치연합을 유지하여 적과 동맹이 수시로 바뀔 수 있는 정치를 말한다”고 주장한다. 리플리는 이 주장을 받아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정치 외의 분야도 마찬가지다. 협력이 중요한 분야에서는 집단 간의 관계를 유연하게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승자와 패자, 내부자와 외부자를 뚜렷이 구분하는 구도를 피해야 한다. 가능한 한 성격이 다른 그룹을 섞어서 운영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그렇다. 기존 이분법 구도는 거대한 사기극이다. 우리 모두를 위한 타협과 협력의 의지가 충만한 사람들을 둘로 쪼개 나라 망치기에 딱 좋은 분노와 증오의 블랙홀만 키워서 좋을 게 무엇이 있겠는가. 우리 모두 각자 가진 소신과 신념을 좀 유예하면서 타협과 협력의 길로 나아가는 대전환을 이루길 소망한다.


경향티비 배너
Today`s HOT
젖소 복장으로 시위하는 동물보호단체 회원 독일 고속도로에서 전복된 버스 아르헨티나 성모 기리는 종교 행렬 크로아티아에 전시된 초대형 부활절 달걀
훈련 지시하는 황선홍 임시 감독 불덩이 터지는 가자지구 라파
라마단 성월에 죽 나눠주는 봉사자들 코코넛 따는 원숭이 노동 착취 반대 시위
선박 충돌로 무너진 미국 볼티모어 다리 이스라엘 인질 석방 촉구하는 사람들 이강인·손흥민 합작골로 태국 3-0 완승 모스크바 테러 희생자 애도하는 시민들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