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필삼선’ 권하는 사회

오창민 논설위원

2019년 10월22일 문재인 대통령이 국회 시정연설을 했다. 당시 최대 이슈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딸의 입시부정 의혹이었다. 예상대로 대통령은 국민이 가장 가슴 아파하는 것이 교육의 불공정성이라며, 학생부종합전형에 대한 실태조사를 추진하고 고교 서열화 해소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이에 덧붙였다. “정시 비중 상향을 포함한 입시제도 개편안을 마련하겠습니다.” 대통령이 입시제도에 관해 말할 수 있지만 큰 줄기나 방향 정도이지 ‘정시 비중 상향’이라고 콕 찍어서 얘기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오창민 논설위원

오창민 논설위원

교육부 공무원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20% 남짓이던 대입 정시모집 비율을 30%로 높인 ‘2022학년도 대입 방안’을 확정·발표한 게 불과 1년 전이었다. 하지만 교육부로서는 대입제도의 안정성이나 예측 가능성을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한 달 만에 나온 것이 서울 16개 대학 정시모집 비율을 40%로 확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대입제도 공정성 강화 방안’이었다. 그 결과 현재 진행 중인 2023학년도 대입에서 서울대 정시모집 비율은 40%로 작년보다 10%포인트 늘었다. 다른 대학들도 정시모집 비율이 40~45%로 높아졌다. 수시모집에서 뽑지 못해 정시모집으로 넘어가는 인원까지 감안하면 정시모집 실질 비중은 50%에 육박하게 된다.

정시모집은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성적으로 선발한다. 수능의 최대 장점은 실제 공정성 여부와 관계없이 국민이 공정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모든 학생이 동일한 조건에서 동일한 시험을 치르고, 컴퓨터가 채점해 학생들의 서열을 매겨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작용 없는 입시정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3 학생 수가 줄면서 올해 수능 응시자는 전체적으로 작년보다 1만471명 줄었지만 졸업생(재수생)은 오히려 7469명 늘었다. 수능 응시자 50만8030명 가운데 졸업생과 검정고시 출신자 비중(31.1%, 15만7791명)은 1997학년도 수능 이후 최고치다. 수능은 재수생들이 유리하다. 내신이나 학생부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 재학생들로서는 수능에만 집중하는 재수생을 당해내기 어렵다.

재수생 증가는 향후 추세로 고착될 가능성이 높다. 재수생이 늘면 고3 재학생이 대입에서 불리해지고, 재학생이 이듬해 재수생이 되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재수생이 누적되기 시작하면 그 이후엔 규모가 매년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반수생 증가도 우려스럽다. 학원업계는 올해 반수생 규모를 5만~6만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비운의 코로나 학번으로 불리는 2020~2022년 입학생들이 대거 반수 대열에 뛰어들었고, 교원 임용 절벽에 교대생들의 반수도 늘었다. 종로학원에 따르면 작년 한 해 일반대·교육대·산업대 등 4년제 대학에서 9만7000명이 학업을 중단했다. 재적 대비 4.9%로 역대 최고 수준이다. 이른바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대학을 그만둔 학생도 1971명이다.

반수생들의 이동 경로를 보면 사회의 학벌주의와 대학 서열화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지방 소재 대학에 다니는 학생은 서울 소재 대학으로, ‘인(in) 서울’ 대학 학생은 주요 상위권 대학으로, ‘SKY’는 의약계열 등으로 갈아타기 위해 반수를 한다. 재수해서 들어간 대학에서 다시 반수를 준비하는 ‘삼반수’, 반수로 대학을 갈아탔다가 또다시 반수를 하는 경우도 있다. 반수생들이 허공에 날리는 등록금만 연간 수천억원이다. 학생이 빠져나가니 대학은 재정난을 겪는다. 학생 개인은 물론이고 대학과 사회에 엄청난 손실이다. 최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22 한국 경제 보고서’에서 학벌주의가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했다.

수능 중심의 정시모집 확대는 문재인 정부 당시 국민 과반이 원하는 정책이었고, 지금도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다. 고소득 가정의 자녀에게 유리하고 일선 고교 교육을 황폐화하는 등 문제가 있지만 지금 시점에서 바꿀 이유는 없어 보인다. 다만 ‘재필삼선’(재수는 필수 삼수는 선택)이 현실이 되면 안 된다. 재수와 반수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방안이 나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머지않아 ‘입시 낭인’이 폭증하고, 이런 요인 때문에 입시제도를 다시 흔들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학령인구 감소로 대학 입학정원이 고교 졸업생 수를 넘어섰지만 입시 경쟁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학생들이 가고자 하는 대학과 학과는 늘 제한돼 있기 때문이다. 어느 대학 출신인지가 취업과 승진, 심지어 결혼까지 영향을 미치는 사회 풍토가 지속되는 한 입시 지옥은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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