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진의 사이시옷

미래의 이름으로 현재를 착취할 때

정유진 국제에디터

실리콘밸리의 혁신가로 추앙받다가 각각 ‘사기꾼’과 ‘빌런’으로 전락한 샘 뱅크먼프리드와 일론 머스크. 이 둘 사이에는 흥미로운 연결고리가 있다. 바로 ‘롱터미즘’(Long-termism)이다. 트위터 인수 작업에 동참하고 싶다는 뱅크먼프리드의 의사를 머스크에게 전달하며 다리를 놓아주려 했던 사람도 롱터미즘의 주창자인 옥스퍼드대 철학교수 윌리엄 매캐스킬이었다.

정유진 국제에디터

정유진 국제에디터

일반인들에게는 아직 생소하지만 현재 실리콘밸리의 IT 거부들 사이에서 꽤 인기를 끌고 있다는 이 사상은 ‘효과적인 이타주의(EA)’라고 불리는 사회운동의 한 갈래이다. EA는 내가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수천, 수만 마일 떨어진 곳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모든 생명은 동등하게 소중하다는 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EA에서 파생된 롱터미즘은 여기서 수십발 더 나아간다. 매캐스킬은 자신의 저서 <우리가 미래에 빚진 것들>에서 “시간의 거리는 공간의 거리와 같다”고 주장한다. 즉 수천마일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들도 중요하다면, 수천년 떨어진 곳에 사는 미래의 사람들도 동등하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인구는 계속 증식한다. 먼 훗날 지금보다 10만배 이상 늘어날 인구수를 고려하면, 50억 인구가 당면한 문제보다 수조명에 달할 미래 인류의 행복을 위해 더 많이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 롱터미즘의 핵심 아이디어다.

10여년 전만 해도 비주류에 불과했던 이 사상은 실리콘밸리의 유명인사들을 추종자로 거느리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뱅크먼프리드는 가상통화 거래소 FTX로 벌어들인 엄청난 부를 기부하겠다면서 FTX재단을 만들었는데, 매캐스킬과 함께 롱터미즘의 창설자로 꼽히는 닉 벡스테드에게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맡겼다. 1억명이 넘는 팔로어를 거느린 머스크는 매캐스킬의 책에 대한 링크를 리트윗하고 “읽을 가치가 있다. (롱터미즘은) 내 철학과 거의 일치한다”는 댓글을 달았다.

5년 단위의 선거 주기에 함몰돼 근시안적인 정책만 남발되고 있는 답답한 현실 속에서 수백, 수천년 후까지 내다봐야 한다는 이들의 주장은 꽤 신선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이들에게 미래 세대의 가장 절박한 이슈인 기후위기는 중요한 우선순위가 아니다. 대신 롱터미즘은 인류의 멸종을 막기 위해 처녀자리 은하단을 식민지화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시급한 윤리적 의무라고 말한다.

또 롱터미즘이 최우선적으로 대비해야 한다고 말하는 인류의 재앙은 언젠가 인간보다 뛰어난 인공지능(AI)이 출현해 세계를 독재하고, 인간을 구식 소프트웨어처럼 삭제해 버리는 것이다. 지금 당장 혐오와 증오를 증폭시키고 있는 트위터나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의 AI 알고리즘 문제는 이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롱터미즘이 실제 머스크의 철학과 얼마나 일치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해 보인다. 이 철학은 화성 식민지 건설 사업을 추진하고, 트위터를 인수하자마자 혐오 발언자들을 모두 복귀시킨 머스크의 이해관계와 일치한다.

어떤 행동의 가치를 판단할 때 당장의 결과가 아니라 수천년 후 미칠 결과를 고려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롱터미즘은 더 많은 돈을 벌어 미래 세대에게 돌아갈 기대가치를 극대화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좋지 않은 결과를 낳는 행동도 용인될 수 있다고 장려한다. 그것이 최대다수 최대행복의 원칙에 부합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미 뉴욕매거진 ‘인텔리전서’는 “롱터미즘이 머스크의 노조 파괴에 도덕적 근거를 제공한다는 의혹이 있다. 테슬라가 인건비를 절감해 전기차로의 전환을 가속화하여 탄소 배출량을 줄이고 더 많은 수익을 올리면 그것이 아직 오지 않은 수천억명의 인류에게 더 이로우므로 용인될 수 있다는 것인가”라고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이는 바로 가상통화 억만장자가 고객에게 수십억달러의 손실을 입히는 데 기여한 도덕 이론이기도 하다. 매캐스킬은 FTX 파산 소식이 전해진 후 노골적인 사기를 저지르는 것은 롱터미즘의 관점에서도 용납될 수 없다며 유감을 표했지만, 애초에 MIT 학생이던 뱅크먼프리드에게 일단 큰돈을 버는 것이 중요하다며 초단타매매와 가상통화 사업을 추천한 것이 바로 그였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구하겠다면서 미래의 이름으로 현재를 착취하는 기술 엘리트의 이데올로기. 눈앞의 작은 정의도 지키지 않는 엘리트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진리로 무장해 스스로를 먼 미래의 구세주로 캐스팅한다. “우리가 수익을 내면 나눌 수 있는 행복이 커지고, 그것이 세상에도 이롭다는 믿음.” 이것이 바로 <엘리트 독식사회>의 아난드 기리다라다스가 말했던 ‘윈윈주의’라는 엘리트들의 거짓 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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