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에 의한 현상 변경’이란 말은 용도가 따로 있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윤석열 대통령은 ‘힘에 의한 현상 변경’이란 말을 자주 쓴다. 최근 로이터통신 인터뷰에서 대만 문제 관련 질문에 “일방적인 현상 변경은 모든 질서와 평화와 안정을 해치는 것이기 때문에 강력하게 반대한다”고 답했다. 지난달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린 아세안 정상회의에서는 한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을 소개하면서 “힘에 의한 일방적인 현상 변경은 용인되어선 안 될 것”이라고 했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지난 9월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도 “오늘날 국제사회는 힘에 의한 현상 변경과 핵무기를 비롯한 대량살상무기, 인권의 집단적 유린으로 자유와 평화가 위협받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윤 대통령이 언급한 ‘현상 변경 반대’는 남중국해·대만해협 등에서 위협적인 행동을 보이는 중국과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겨냥한 것이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중·러뿐 아니라 북한에도 이 말을 쓴다. 그는 지난 8월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북한 지역에 무리한, 또는 힘에 의한 현상 변경은 전혀 원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의 언급 때문인지 지난달 21일 통일부가 내놓은 ‘윤석열 정부 통일·대북정책’ 설명자료에도 같은 표현이 들어가 있다.

‘현상 변경(changing status quo)’은 정치학에서 국가·정치세력 간의 상호작용을 설명할 때 쓰이는 개념이다. ‘현상(現狀)’이란 누가 어떤 권리와 특권을 갖고 있는지 모두가 인식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즉, 어떤 것이 내 것이고 어떤 것이 상대의 것인지 서로 인지하고 있는 상태가 현상이다. 영토와 같은 지정학적 경계,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 등을 의미하는 공간적 개념으로 주로 사용되지만 합의된 국가 간 약속이나 이미 정립된 질서에 따른 행위도 현상에 포함된다. 따라서 영토의 침탈뿐 아니라 협약을 일방적으로 깨거나 폐기하는 것, 상호 인정하고 있는 정해진 행위를 따르지 않는 것도 현상 변경 시도에 해당한다. 힘을 사용한 현상 변경 시도는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 현상 변경 시도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의지를 보이지 않거나 대응할 힘이 없으면 전쟁에 이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현상 변경이 이뤄지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 외교무대에서 국가 간에 일어나는 모든 강압적 행동을 ‘힘에 의한 현상 변경’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이 표현이 그동안 현실 국제정치에서 쓰여온 의미와 맥락이 있기 때문이다. 이 표현은 냉전시대 서방이 공산권 진영의 행위를 비난할 때 썼다. 근래 들어서는 2010년 중·일이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놓고 분쟁을 벌일 때 뉴스에 자주 등장했다. 센카쿠를 실효지배 중인 일본은 덩치를 키운 중국이 힘을 앞세워 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힘에 의한 현상 변경을 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이후 일본이 미국·유럽연합(EU) 등과 외교협의 결과나 공동성명을 발표할 때 빠짐없이 이 표현이 들어갔다. 이어 2014년 러시아가 크름반도를 강제병합했을 때 미국은 러시아를 향해 “국제법을 위반한 힘에 의한 현상 변경”이라고 비난했다. 또 지난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도 예외 없이 이 표현이 나왔다.

지금 외교 현장에서 “힘에 의한 현상 변경에 반대한다”는 말은 영토 침탈 시도를 비난하는 일반적 표현이 아니다.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를 바꾸려는 중국과 러시아를 ‘비자유주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을 중심으로 단합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쓰는 말로 굳어져 있다.

외교 용어 중에는 이처럼 특정한 의미와 인식을 담고 있는 표현이 많이 있다. 한·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에 ‘대만해협의 안정과 평화’라는 표현이 들어간 것에 대해 정부는 일반적 의미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평화와 안정’은 일반적으로 많이 쓰이는 평범한 말이지만 그것이 ‘대만해협’과 결합되면 “중국이 대만에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반대한다”는 뜻이 된다는 것을 모든 나라가 알고 있다. 윤 대통령이 “북한 지역에 힘에 의한 현상 변경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아마도 흡수통일을 시도하거나 북한 체제를 위협할 생각이 없다는 메시지를 북한에 전달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말을 북한에 쓰는 것은 국제정치적 맥락에서 잘못된 것이다. 전 세계의 오디언스(청자)들을 의아하게 만들 뿐 아니라 오해의 소지도 있다. ‘담대한 구상’에 대한 북한의 경계심을 불식시키기 위한 목적이라면 이 말 대신 “체제 전복을 시도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밝히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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