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식 중화요리의 발상지…혼종 문화의 강인한 생명력 상징

김찬휘 녹색당 공동대표

(55) 인천 차이나타운

1971년, 2021년 차이나타운. 셀수스협동조합 제공

1971년, 2021년 차이나타운. 셀수스협동조합 제공

2015년 쿠바의 아바나에 배낭여행을 갔을 때이다. 1959년 쿠바혁명이 일어나기 전 수입된 노란색 올드카(old car)를 타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는데, 낯선 동양식 대문이 보였다. 문 위에는 ‘화인가(華人街)’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차이나타운이었다.

고립된 혁명국가 쿠바에서도 살아 있는 차이나타운은 무수한 중국인의 한 많은 이주의 역사이자 그들의 질긴 삶의 표현이다. 19세기 흑인 노예무역이 금지되자 식민지에는 노동력이 부족하게 되었다. 흑인 노예를 대신한 것은 중국과 인도의 가난한 농민들이었다. 이들을 영어로 ‘쿨리(coolie)’라 불렸는데 ‘머슴’을 뜻하는 힌디어에서 왔다고 한다. 중국어 음차로는 ‘고력(苦力)’이라 한다니, 그들의 처지를 짐작할 수 있다.

청나라 시대는 중국인 대량이주의 시기였다. 조선도 예외가 아니었으니 1883년 개항한 인천으로 주로 산둥성 출신의 중국인들이 부두 노동일을 찾아 들어왔다. 개항장에는 재판, 치안, 과세 등 치외법권을 가진 외국인 거류 지역인 ‘조계’(租界)가 설치되었고, 청국 조계의 흔적은 지금 인천 차이나타운으로 남아 있다.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공자상이 있고, 꼭대기 계단은 조계지 거주 외국인들의 휴식처로 조성된 ‘자유공원’으로 이어진다. 계단을 따라 인천시가 석등을 설치했는데, 왼쪽 석등은 중국식, 오른쪽은 일본식이다. 계단을 사이에 두고 완전히 다른 풍의 가옥들이 펼쳐져 있다. 계단 왼쪽의 전서경 가옥은 120년이 넘었고 옛 청국영사관 부속 건물이었던 ‘회의청’도 110년이 넘었다. 사진 속의 건물은 140년이 된 건물로 석조건물이라 인천상륙작전의 포화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짜장면의 발상지인 옛 공화춘 건물은 짜장면박물관으로 바뀌어 있다.

노동자가 가니 음식과 상인이 함께 따라가지 않을 수 없고, 그 과정에서 중국의 작장면(짜지앙미엔)은 인천에 들어와 짜장면이 되었다. 미국 서부에서 미국식 중국요리(American Chinese cuisine)가 발원했다면, 인천은 ‘중화요리’의 발상지인 것이다. 차이나타운은 혼종(hybrid) 문화의 강인한 생명력을 상징한다. 오늘 수도권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종점에서 내려야겠다.

*이 칼럼에 게재된 사진은 셀수스협동조합 사이트(www.celsus.org)에서 다운로드해 상업적 목적으로 사용해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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