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딱서니 없는 고용허가제, 이제 손절할 때

이란주 아시아인권문화연대 활동가
[시론] 철딱서니 없는 고용허가제, 이제 손절할 때

A가 B국으로 일하러 갔다. B국 정부는 언어능력시험으로 A를 선발해서 고용주 C와 근로계약을 맺게 했다. B국 정책에 따라 C는 A를 독점적으로 고용할 수 있다. 기준에 못 미치는 노동 및 주거환경을 제공해도 독점권을 유지할 수 있다. 과연 A는 권리를 보장받으며 일할 수 있을까. 답은 ‘복불복’이다. 운이 좋아 훌륭한 C를 만나면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을 테고, 나쁜 C를 만나면 그야말로 꽝이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법과 제도를 만들며, 꽝을 줄이고 누구든 고르게 권리를 누리는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해 왔다. 그런데 웬걸, 무슨 국가적 이기심이 발동했는지 꽝을 쓸어 담아 A들에게 몰아주는 제도를 만들었다. 고용허가제 이야기이다.

이란주 아시아인권문화연대 활동가

이란주 아시아인권문화연대 활동가

고용허가제는 ‘외국인근로자의 체계적인 도입, 관리를 통하여 중소기업의 인력난 완화와 국민경제의 균형 있는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2004년부터 운영되었다. 이 제도는 20년 내내 노동자들의 비판과 원성을 들어왔다. 무려 두 차례나 헌법소원을 제기당했을 정도다. 가장 큰 원성은 독점권(사업장 변경 제한) 때문이다. 중소기업에 안정적으로 인력을 제공하려는 목적이라는데, 노동자에게는 기막힌 폭력이자 차별이다. 회사를 옮길 권리는 노동자가 자신을 보호하며 더 나은 삶을 추구할 수 있게 하는 기본적 권리다. 그것을 빼앗기고 복불복의 덫에 걸린 노동자들의 삶은 처참하다. 피란민 천막을 방불케 하는 숙소, 과다한 숙소비 갈취, 임금체불과 산업재해, 질병, 월화수목금금금 12시간을 넘나드는 쉼 없는 노동. 심지어 피 같은 노동시간을 사기당하기도 하고, 폭언·폭행·성희롱·성폭행에 시달리기도 한다. 임금을 갈취당하지 않으려면 노동자가 직접 노동시간을 입증해야 하고, 덫에서 놓여나려면 고용주의 학대와 법률위반 증거를 확보해야 한다. 그 이유로 노동자들은 입증자료 수집 방법을 익히고 연구한다. 매우 부끄러운 현실이다.

노동자 기본권 뺏고 ‘복불복의 덫’

초기 3년이던 고용허가제 계약기간은 곧 ‘3년+1년10개월’로 조정되었고, 다시 ‘4년10개월+출국 후 재입국+4년10개월’로 바뀌었다. 거듭된 변화는 숙련 노동자를 놓치기 싫다는 기업들의 요청 때문이었다. 4년10개월은, 5년 이상 체류자에게 주어지는 영주권 신청 자격을 노동자가 갖지 못하도록 세심하게 계산한 기간이다. 고용허가제 노동자는 10년 가까이 일해도 원칙적으로 회사를 옮길 수 없고, 영주할 수 없고, 가족을 동반할 수 없다.

지난 12월 말, 정부는 ‘산업현장과 인구구조 변화에 대응하는 고용허가제 개편방안’을 발표했다. 20년 만의 개편방안은 제목부터 무게감이 느껴진다. 인구소멸 위기라는 시대상황을 담았을까 기대를 부르는 제목이다. 그러나 어쩌나, 있어야 할 알맹이가 없다.

골자는 이렇다. 단순노무직에 단기순환 노동자를 공급해오던 기존 방식을, 노동자의 기술 숙련을 도와 오래 고용하는 방식으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동일 사업장에서 일정 기간 이상 근무하며 기술과 한국어를 익혀 ‘준숙련인력’으로 인정받으면 ‘출국 후 재입국’하지 않고도 10년 이상 일하도록 우대한다고 한다. 또 노동력 수요를 제대로 파악하고 업종기준과 직종기준을 교차 적용하여, 한국인이 기피하는 일자리 적재적소에 배치하겠다는 계획이다. 구체적으로, 도매·유통업은 서비스 업종이므로 고용허가제 노동자를 배치하지 않았는데 그중 한국인이 기피하는 상하차 직종에는 앞으로 배치하겠다는 말이다. 이처럼 더 많은 분야에 더 많은 노동력을 공급하겠다는 의지가 개편방안에 가득하다. 근로여건을 개선하고 산업안전을 강화하겠다는, 노동자를 향한 립서비스가 얹혀 있지만 언 발에 오줌 누는 수준이다. 한 가지 예상되는 점은, 4년10개월로 묶였던 체류기간 제한에 틈이 생기면서 ‘5년 이상 체류하여 정주 자격’을 갖추는 노동자도 생겨나리라는 점이다. 제목에서 언급한 ‘인구구조 변화’에 조응하는 유일한 내용이다.

알맹이 없는 개편방안에 허탈감

개편에 담겼어야 하는 알맹이는 이런 것이다. 고용허가제 노동자에 대한 사업장 변경 제한 폐지, 근로기준법을 비롯한 노동법 전면 적용, 가족결합권 보장, 일정 자격을 갖추면 취업 업종과 규모 제한 폐지, 영주권 부여, 농축어업 노동자 등에게 근로시간·휴게·휴일에 관한 규정 적용을 제외한 근로기준법 63조 개정, 농어업 노동자에 대한 임금채권보장법 전면 적용.

노동력을 빨리 더 내놓으라는 아우성에 정부는 다급하다. 지난해 6만9000명이던 고용허가제 노동자 도입 규모를 올해는 11만명으로 늘렸다. 또 2023년 상반기 전국 124개 지자체에 농·어업 분야 계절노동자 2만6788명을 배정한다고 한다. 지난해에 견줘 2.2배에 달하는 큰 규모다. 지방자치단체가 추천하는 외국인에게 거주비자를 주고 지역 정착을 유도하는 ‘지역특화형 비자’ 시범사업도 시작되었다. 향후 이민정책을 주도할 ‘이민청(가칭)’ 설립도 추진하고 있다.

제각각인 듯 보이지만 한 방향으로 모아진다. 앞으로 더 많은 이주자와 공존하게 된다는 점이다. 지난 20년간 우리 사회는 놀라울 만큼 변했다. 고용허가제를 처음 설계하던 시절과는 전혀 다른, ‘인구소멸’이라는 거대한 문제에 직면한 세상이다. 그런 지금, 차별을 이용해 값싼 이익을 만들어내던 제도를 여전히 고집하면 곤란하다. 고용허가제는 차별과 분열이라는 짐 더미로 쌓여 미래 세대의 어깨를 누르고 큰 대가를 요구하게 될 것이다.

힘겨운 일을 대신할 사람이 필요한가? 인구소멸이 두려운가? 계속 부자 나라에 살고 싶은가? 그래서 다른 나라 시민을 받아들여 대한민국을 유지하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제발 철 좀 들자. 사람만이 아니라 법과 제도 역시 시절에 맞게 철들어야 한다. 철딱서니 없는 고용허가제를 손절하고, 이 사회를 함께 책임질 구성원을 어떻게 초대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자. ‘사람’을 빼놓고 ‘노동력만 도입’할 방법은 없다는 것을 시행착오를 거치며 배우지 않았는가. 사람을 정중하게 초대하고 권력과 권리를 동등하게 나누자. 그러기 싫다고? 그렇다면 고된 노동을 직접 감당하고, 국가 경제력 하락과 인구소멸을 담담히 받아들이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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