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의 카르텔에 맞서는 공조 히어로물

김선영 TV평론가
[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 탐욕의 카르텔에 맞서는 공조 히어로물

국내에서 법조인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는 크게 법정물과 영웅물로 나뉜다. 지난해 법조인 드라마 열풍 속에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ENA), <소년심판>(넷플릭스)과 같은 정통 법정물이 큰 사랑을 받기도 했지만, 더 오랜 전통을 지닌 후자 역시 꾸준한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이탈리아 마피아 변호사 캐릭터를 내세운 <빈센조>(tvN)나 천재 사기꾼으로 재탄생한 변호사의 이야기 <빅마우스>(MBC) 등 최근 작품을 보면 한국형 슈퍼히어로물로서의 성격이 점점 노골화되는 경향을 알 수 있다.

김선영 TV평론가

김선영 TV평론가

지난 6일, 방영을 시작한 SBS 금토드라마 <법쩐>(사진)도 말하자면 후자의 계보에 속하는 작품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꽤 변칙적인 히어로물이다. 이 계보의 전통을 따르자면, 극 중에서 “싸움꾼 청년 검사”로 묘사되는 장태춘(강유석)이 히어로의 위치에 놓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 작품의 제1 주인공은 뜻밖에도 명동 사채 바닥에서 일을 시작해 막대한 부를 일궈낸 사모펀드 대표 은용(이선균)이다. 은용은 시장의 흐름을 읽어내는 비상한 두뇌와 자본력을 기반으로 조카인 태춘을 도우며 거악과 싸운다. 여기에 검찰 조직에 환멸을 느끼고 검사직을 그만둔 법무관 육군 소령 출신 박준경(문채원)이 동료로 합세한다.

이 작품의 흥미로운 인물 설정은 법조물 트렌드의 변화와도 관련이 있다. 극본을 7년간 준비해 온 것으로 알려진 김원석 작가는 지난 16일 스브스프리미엄(스프)과의 인터뷰에서 “처음에는 심플하게 정의로운 검사들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작가가 이 드라마를 본격적으로 준비하던 2010년대 중후반은 ‘법꾸라지’라는 신조어가 유행하던 시기였다.

실제로 그 당시 쏟아져나온 법조물을 살피면 부패한 법조인이나 법조계의 적폐 자체가 최종 악역을 담당하면서 사법 불신의 시대적 정서를 반영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에 따라 법조물의 전통적인 히어로를 담당하던 열혈 검사 캐릭터 대신, 검찰 조직 바깥에서 소시민의 삶에 밀착한 변호사나 엄격한 심판의 판타지를 녹여낸 공정한 판사 같은 캐릭터들이 새로운 히어로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법쩐> 인물 구도에는 이 같은 시대적 흐름이 엿보인다. 가령 이 작품의 최종 악역 중 하나인 특수부 부장검사 황기석(박훈)이 휘두르는 무소불위의 권력에는 지금 우리 시대의 특권층으로 자리 잡은 법복귀족들의 현주소가 투영되어 있다. 드라마는 이 공고한 권력에 돈의 힘을 더한다. 또 다른 악역인 사채왕 명인주(김홍파) 회장은 이익을 위해서라면 살인도 불사하는 범죄자다. 그는 사위인 황기석을 비롯한 엘리트 검찰 권력과의 수익 공유를 통해 수많은 불법 행위를 무마하고 부를 끝없이 증식시킨다.

<법쩐>이 그리는 법과 돈, 그 탐욕의 카르텔은 지금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가장 막강한 권력이다. 지금까지 이 권력의 카르텔을 비판하는 법조물이 적지 않았지만, <법쩐>만큼 이 관계를 밀도 있게 그린 작품은 드물다. 탐욕스러운 법비들과 부패한 자본 권력의 결탁은 단순한 야합이 아니라 아예 운명을 같이하는 이익공동체로 그려진다. 이 굳건한 카르텔에 맞서기 위해 주인공들에게도 공조와 연대가 필수적이다. 검찰 조직 안에 있는 장태춘과 그 조직의 비리를 생생하게 목격한 박준경이 내부고발자 역할을 할 때, 은용은 그들의 정보와 자본의 힘을 이용해 전면 공격수로 활약한다. 서로를 “우리 편”이라 부르는 이들의 끈끈한 공조는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만큼 부조리한 현실의 벽이 높다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현실의 그늘이 짙을수록 판타지의 세계도 커진다. 히어로물의 공식을 따르더라도 최소한 현실에 기반했던 국내 법조물의 전통은 좀처럼 뒤바꾸기 어려운 현실의 벽 앞에서 점점 판타지화되어 가는 경향을 보여왔다. 말하자면 신데렐라 복수극이 더는 불가능해지자, 회귀 판타지를 끌어와 거대재벌과 맞서는 주인공을 그린 <재벌집 막내아들>의 서사 전략과도 유사하다. 요컨대 <법쩐>은 본격적인 한국형 슈퍼히어로물로서의 성격을 굳혀가는 국내 법조물 트렌드의 최전선에 위치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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