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큼한 제주레몬읽음

권은중 음식 칼럼니스트

2019년 10월 말 이탈리아 시칠리아 남서부 도시 마르살라. 10월은 시칠리아의 여름이 끝나고 우기가 시작되는 때다. 나는 운이 없게도 이런 때 주정강화 와인인 마르살라 제조 과정을 보려고 이 도시를 방문했다. 양조장 견학을 끝내고 나는 비를 피해 아무 식당이나 들어갔다. 마르살라항 근처의 허름한 곳이었다. 저녁을 해결할 요량으로 도미구이를 시켰다. 얼마 뒤 도미 오븐구이가 나왔는데 나는 깜짝 놀랐다. 올리브 오일을 바른 채 오븐에 구워진 큰 도미 한 마리가 통째로 나왔다. 채소라고 해야 약간의 파슬리와 레몬 4분의 1 조각이 전부였다. 소스가 생명인 서양요리와 한참 벗어난 모양새였다. 약간 설익은 것도 같았다. 잠깐 고민했지만 밖에는 비가 여전히 퍼붓고 있었다. 나는 레몬을 뿌려 도미를 먹기 시작했다.

권은중 음식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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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도미는 아주 뜨거웠고 완벽하게 익었다. 올리브 오일과 레몬즙은 흰 도미살의 풍미를 한껏 끌어올렸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 늙은 어부가 거대한 청새치와 사투 중에 뱃머리에 던져놓은 정어리를 씹으면서 “레몬만 있었다면…”이라고 되뇌던 게 이해됐다. 알프스 북쪽 사람들이 버터·생크림으로 만든 소스에 집착하는 것은 그 지역에 레몬과 올리브 오일이 없기 때문이라는 근거 없는 추측도 해봤다.

그만큼 레몬은 이탈리아 요리에서 중요하다. 레몬은 생선 같은 메인 요리뿐 아니라 전채인 샐러드, 케이크나 젤라토 같은 디저트로도 쓰인다. 쓰임이 무궁무진하다. 그래서 이탈리아에서는 레몬을 직접 키우는 집이 많다. 사시사철 레몬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수입 레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국내산 레몬은 겨울에만 나오는 탓이다. 레몬은 과즙뿐 아니라 껍질을 쓰는 경우도 많아 무농약이나 유기농 레몬이 이탈리아 요리를 즐기는 나에게는 중요하다. 수입레몬은 매끈한 표피를 유지하기 위해 표면에 왁스나 약품을 처리한다. 외국 정부가 안전성을 인증한 왁스라고 하지만 찜찜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레몬을 겨울에만 생산하는 이유는 먼저 겨울이 제철이기 때문이다. 겨울에 껍질도 얇고 즙이 많다. 하지만 국내산 레몬에 대한 수요가 없는 탓도 있다. 국내산 레몬의 국내 시장 비중은 1%대에 머문다. 그래서 사시사철 생산하면 수지가 맞지 않는다.

얼마 전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의 레몬 농장을 방문했다. 1년 내내 무농약 국산 레몬을 구하는 방법을 알고 싶어서였다. 농장주는 물량만 안정적이라면 이탈리아처럼 겨울 외에도 레몬을 공급해줄 수 있다고 약속해 나를 들뜨게 했다. 이탈리아에서도 못 봤던 보랏빛 레몬꽃을 본 것도 수확이었다. 그렇지만 혼자서 그 많은 레몬량을 감당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아 한편으로는 머리가 아팠다.

내가 이탈리아에서 가장 좋아했던 레몬 젤라토를 만들어 지인들에게 열심히 선물해야 할까? 아니면 내가 졸업했던 이탈리아 요리 학교 출신 셰프들과 함께 공동구매를 해볼까? 그렇게 해서라도 나는 안전하고 건강한 제주 레몬을 사계절 즐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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