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표 서원대 교수
1925년 세워진 옛 서울역의 현재 모습.

1925년 세워진 옛 서울역의 현재 모습.

지난해 12월 문을 연 서울 제기동 ‘경동1960’의 인기가 대단하다. 경동시장의 3, 4층에 위치한 옛 경동극장의 내부 공간을 스타벅스 카페 매장으로 꾸민 곳. 경동1960은 1960년 출범한 경동시장과 경동극장을 의미한다. 이곳에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옛날 경동극장의 내부 구조와 분위기를 최대한 살렸기 때문이다. 근대 건축물을 활용하는 뉴트로(New+Retro) 열풍과 맞물린 셈이다.

이광표 서원대 교수

이광표 서원대 교수

그런데 경동1960 여기저기를 둘러보아도 경동극장의 내력에 관한 정보는 찾아볼 수가 없다. 이곳이 극장 건물이 아니었다면 경동1960도 불가능했을 것이고, 지금의 인기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경동극장의 내력에 관한 스토리를 제공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 텐데, 그게 없다니…. 근대유산 경동극장에 대한 결례가 아닐 수 없다.

부산 수영구 망미동에 가면 복합문화공간 ‘F1963’이 있다. 이곳은 고려제강의 옛 수영공장 건물이었다. 고려제강은 교량용 철제 케이블을 비롯해 다양한 와이어를 만드는 기업이다. 이 공장에선 1963년부터 2008년까지 45년 동안 와이어 로프를 생산했다. 옛 와이어 공장의 분위기를 그대로 살려 지금은 카페·전시·공연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여기서 1963은 공장을 지은 해이고 F는 Factory를 뜻한다.

우리 근대건축물 가운데 가장 상징적인 것을 꼽는다면 옛 서울역사(驛舍)를 빼놓을 수 없다. 지금 이곳의 이름은 ‘문화역서울284’. 이 건물은 1925년 건축되었다. 2004년 KTX 개통과 함께 새로운 서울역 건물이 들어서면서 옛 서울역사는 그 기능을 마감했다. 이후 한동안 방치되다 원형 복원을 거쳐 2011년 복합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때 이곳의 이름을 ‘문화역서울284’로 지었다. 사적 284호 옛 서울역사를 문화 네트워크의 중심 역(驛)으로 만들겠다는 취지를 살린 것이다.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284라는 숫자가 참으로 뜬금없어 보인다. 이 숫자가 보통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경동1960의 1960과 F1963의 1963은 건립 연도이기에 그 자체로 경동극장과 고려제강의 역사적 맥락과 정보를 간명하게 제공해준다. 1960년대 우리 근대의 지난함과 낭만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적절한 작명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문화역서울284는 그렇지 않다. 여기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사적 지정번호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게다가 ‘사적 284호’란 용어마저 사라져 버렸다. 2021년 국가 지정 문화재(국보, 보물, 사적, 천연기념물 등)의 번호를 폐지했기 때문이다. 국보 1호 숭례문, 사적 284호 옛 서울역이 아니라 이제 국보 숭례문, 사적 옛 서울역이다. 이런 상황에서 문화역서울284의 284는 그저 무의미한 숫자일 뿐이다. ‘문화역+서울’이라는 단어 조합도 모호하기는 마찬가지다.

경동1960이나 F1963이란 이름은 그 메시지가 선명하다. 근대유산의 시대적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온다.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문화역서울284는 그렇지 않다. 지나치게 관념적이다보니 별 매력을 느낄 수 없다. 게다가 이곳에서의 전시와 공연 콘텐츠도 옛 서울역의 본질과 관련이 없다. 그동안 이곳에서 전시와 공연이 수없이 열렸지만 옛 서울역의 본질과 내력을 제대로 구현한 경우는 보지 못했다.

옛 서울역이 어떤 곳인가. 20세기 근현대사의 영욕과 민초들의 애환이 가장 드라마틱하게 남아 있는 곳 아닌가. 옛 서울역은 우리네 삶 그 자체였고 그렇기에 그 스토리 또한 무궁무진하다. 그런데 지금의 문화역서울284에선 그런 것들을 만날 수가 없다. 이번 설 연휴 동안에도 문화역서울284는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다. 대한민국 최고 근대유산인 옛 서울역의 공간을 이렇게 활용해도 되는 것인가. 진지한 성찰과 창의적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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