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 너머 민심도 읽지 않는 조정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1633년 음력 1월8일, 예안현(현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에 사는 시골 선비 김령은 정초부터 서울 소식에 신경이 곤두섰다. 지난 연말 서울을 다녀온 김우익의 말에 따르면, 서울은 금세 전쟁이 일어나도 누구 하나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정도의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봉화 현감 이구가 전해 준 서울 상황도 그랬다. 그는 서울에 사는 아들 이척연이 남쪽에 사는 장인에게 말과 사람을 급히 보내달라 요청했다면서, 성급한 아들의 처신에 혀를 찼다. 서울 민심이 급하긴 급한 모양이었다. (출전: 김령, <계암일록>)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김령의 궁금증을 해소해 준 것은 예안 현감이 보내 준 조보였다. 후금(1636년 청나라로 개창)을 달래기 위해 파견된 회답사(回答使) 신득연이 압록강 근처에서 입국을 거부당했기 때문이었다. 외교 문제였다. 1627년 후금 침략으로 발발한 정묘호란은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는 것으로 겨우 끝났다. 조선은 명나라를 사대(事大)하면서, 동시에 후금을 형제의 예로 대해야 했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의 명분 가운데 하나로 후금에 대한 광해군의 실리 외교를 들었던 인조와 반정공신들은 내적으로라도 명나라에 대한 사대의 예를 강조해야 했다. 의전, 예물, 조공의 양 등에서 명나라와 차이를 둔 이유였다. 그런데 명나라와 동일한 예물과 조공을 약속받았던 후금 입장에서 이는 조공의 양이 아닌, 신뢰의 문제였다. 1632년 음력 11월 조선에 파견된 후금 사신 역시 이를 문제 삼았다. 그러나 명에 대한 명분론이 강했던 조선 조정은 이를 해결하지 못했다. 당연히 후금 사신은 불만을 안은 채 돌아갔고, 그제서야 힘 약한 조선은 그들의 불만을 국가 안보에 대한 불안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회답사를 보내기로 결정한 이유였다. 그런데 이렇게 파견한 회답사가 국경에서 발목이 잡혔으니, 예상되는 후금의 선택지는 무력행사 외에 거의 없어 보였다.

음력 12월23일, 압록강 건너 구련성(九連城)에서 말을 탄 후금 군사 10여명이 압록강을 건넜다는 국경의 보고만으로 서울 민심은 패닉에 빠졌다. 회답사 거부를 통지하기 위한 전령이었지만, 서울 민심은 전후 상황을 논리적으로 파악할 여유조차 없었다. 김우익의 말에 따르면, 이러한 상황을 증폭시킨 또 하나의 요인은 온갖 흉흉한 소문이었다. 떠도는 소문의 내용은 주로 오랑캐들이 ‘통신사나 물품도 보낼 필요가 없다. 그냥 싸워서 결판을 내겠다’라고 했다는데, 이와 유사한 소문들이 말만 조금씩 바뀐 채 서울 도성 이곳저곳을 휩쓸고 다녔다. 서울 백성들에게 도성은 이미 전쟁터였고, 이를 눈앞에서 보게 될 일도 시간문제로 생각했다.

이러한 민심에도 불구하고, 태평하기 이를 데 없는 곳도 있었다. 잘못된 외교 정책과 내부 갈등으로 이 사태를 초래한 조정이었다. 회답사 거부에 따른 대책을 두고 얼굴 붉힌 언쟁만 있었을 뿐, 결론은 안이하기만 했다. 그나마 비국(비변사)에서 혹시 있을 변란에 대비해야 한다는 요청을 인조가 윤허한 게 대책의 전부였다. 당시 인조의 관심은 아버지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追崇)하는 데 맞추어져 있었다. 이미 인조는 이를 기념할 과거 시험까지 명해 둔 상태였다. 태평성대 때나 있는 행사인지라, 백성들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조정은 과거 시험을 철회할 의사가 없어 보였다.

물론 조정이 백성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준비한 행사라면, 차라리 반가운 일일 터였다. 그러나 서울에서 몇백 리나 떨어져 있는 예안 고을 선비의 눈에도 오랑캐의 말발굽에 종묘와 사직이 더럽혀지는 게 우려될 정도였으니, 당시 조정 상황이 어떠한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조정이 이렇게 태평하다는 것은 담 하나 너머의 도성 민심마저 파악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4년 뒤인 1637년 정월, 조선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패배를 안겨 준 병자호란은 이렇게 준비되고 있었다.


Today`s HOT
경찰과 충돌하는 볼리비아 교사 시위대 황폐해진 칸 유니스 교내에 시위 텐트 친 컬럼비아대학 학생들 폭우 내린 중국 광둥성
러시아 미사일 공격에 연기 내뿜는 우크라 아파트 한국에 1-0으로 패한 일본
아름다운 불도그 선발대회 지구의 날 맞아 쓰레기 줍는 봉사자들
페트로 아웃 5연승한 넬리 코르다, 연못에 풍덩! 화려한 의상 입고 자전거 타는 마닐라 주민들 사해 근처 사막에 있는 탄도미사일 잔해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