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잠이 필요한 사람에게

인아영 문학평론가

우리는 살면서 잠자는 데 꽤나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그 비중에 비해 잠에 관한 이야기는 의외로 적다. 잠과 현실을 가로지르며 인생이 한낱 부질없는 꿈이라고 넌지시 알려주는 김만중의 <구운몽> 같은 고전소설이라면 모를까 근대 이후로는 더욱 그렇다. 구조적으로 더 많은 생산과 더 빠른 발전을 끝없이 원하는 근대사회에서 잠은 게으름과 제자리걸음의 표상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 잠은 아무리 힘센 권력으로도 통제되지 않는 개인의 자유와 비밀을 보장하는 세계다. 누군가는 잠이 “근대가 끝내 포획하지 못한 거의 유일한 추문”이라고 말했을까. 문학에서는 아무리 이상한 추문도 아름다운 꿈이 되곤 하므로, 인물이 잠드는 장면을 꽤나 자주 그렸던 박완서의 소설을 읽다 보면 전쟁의 여파에서도 이런 문장을 불쑥 만나게 된다. “단잠을 잤기 때문인지 맑은 아침이기 때문인지 새로운 용기가 솟았다.”(‘나목’)

인아영 문학평론가

인아영 문학평론가

박솔뫼 소설집 <믿음의 개는 시간을 저버리지 않으며>(스위밍꿀, 2022)의 잠자는 사람들에게도 맑은 용기가 있다. 가까운 미래일지도 아니면 머나먼 과거일지도 모르는 이 세계에서 사람들은 하루를 마무리하는 수면이 아니라 온갖 생산을 멈추고 겨울 내내 취하는 동면을 선택한다. 동면이 필요한 사람은 무언가를 잃은 사람, 어딘가가 아픈 사람, 그냥 오래 자고 싶은 사람, 별달리 그렇지 않아도 쉬어야 하는 사람, 그러니까 누구나일 수 있다. 동면은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전문직 종사자가 선택하는 밀도 높고 짧은 휴식이기도 하지만 여행이나 운동처럼 유난스럽지 않게 보내는 여가 시간이기도 하다. 치과 의사 허은은 아이를 유산한 이후 장기 휴가를 내고 따뜻한 온양의 호텔에서 동면하기로 결심하면서 일기에 이렇게 적는다. “새롭게 시작하는 것들에 늘 관심이 있고 그것을 정확하게 받아들이고 싶다. 동면을 해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여름의 끝으로’)

제각각의 이유로 동면을 하는 사람들이 잠들고 꿈꾸고 먹고 마시고 산책하고 일기를 쓰는 일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매일 속에서 일과 쉼이 번갈아 되풀이되는 느슨하고 부드러운 리듬을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박솔뫼의 소설은 이미 평온한 세계를 알려준다. 그런데 이 책의 한 가지 더 특별한 점이 있다면 동면을 하는 사람에게 그를 보살펴줄 한 명의 가이드가 필요하다는 것. 이 소설들은 바로 타인을 돌보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 이 이야기 속에서 타인에게 돌봄을 베푸는 행위와 스스로를 돌보는 행위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 온양에서 허은이 동면을 하는 동안 가이드인 ‘나’는 시간표를 분 단위로 짜두고 허은의 상태를 체크한다. 허은을 보살피는 매일의 정해진 일들 가운데 조용히 빵과 우유를 먹고, 미뤄둔 책을 읽고, 마트와 도서관에 다녀오고, 자고 있는 친구의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문득 그녀를 완전히 이해해버릴 것 같은 이상하고 두려운 기분에 휩싸이기도 하면서, ‘나’는 생각을 줄이고 숨 막히는 서울 생활로부터 조금씩 회복해나간다.

이것은 단지 아주 길고 깊은 잠이 필요한 사람들의 이야기, 생산과 발전을 잠시 멈추고 그저 자고 꿈꾸고 먹고 마시고 걷는 이야기. 그러나 그 리듬 속에서 잠은 비(非)수행이나 생리적인 현상이 아니라 끝없이 다른 것과 연결되게 하는 통로가 된다. “어쩌면 잔다는 것은 연결된다는 것. 허은은 자신에게 침투한 많은 기억들과 유산한 아이가 어디선가 만날 것이라는, 거기에는 가느다란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반복해서 해나갔다. 어디선가 그들은 만났고 다른 곳에서 그들은 또 만나고 있으며 만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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