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묵과 자포자기

노승영 번역가

제가 아묵이 된 것은 1856년 어느 날이었습니다. 노름판에서 전 재산을 탕진하자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저뿐 아니라 아내와 자식들까지 노예로 팔릴 거라 생각하니 정신이 나가고 말았습니다. 길거리로 뛰쳐나가 마구잡이로 칼을 휘둘러 열일곱 명을 해치고 저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노승영 번역가

노승영 번역가

영어 숙어에 ‘run amok’이라는 말이 있다. ‘길길이 날뛰다’라는 뜻이다. ‘amok’은 말레이어 ‘아묵’에서 왔다. 아묵은 정신착란과 비슷한 극도의 흥분 상태에 빠져 마구잡이로 인명을 살상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빚을 졌는데 갚을 길이 막막하거나 자신의 노름빚 때문에 아내나 자식이 노예가 되게 생겼거나 빼앗긴 것을 되찾을 방법이 없는 사람은 아묵이 된다. 말레이 제도의 전통 단검 크리스를 움켜쥐고 길거리로 나가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베고 찌르면 겁에 질린 군중은 “아묵! 아묵!” 하고 외친다.

아묵은 길길이 날뛰며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다가 결국은 중과부적으로 목숨을 잃는다. 인도네시아의 마카사르(지금의 우중판당) 지방에서는 한 달에 한두 번씩 아묵이 생겼으며 그때마다 스무 명까지도 목숨을 잃거나 다쳤다고 한다.

사람들은 아묵을 두려워할 뿐 적개심을 느끼진 않는다. 자신도 언제든 아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묵의 활활 타는 분노는 모든 행위를 (가능성의 범위에 넣는다는 의미에서) 정당화한다. 내가 아묵에 대해 알게 된 것은 5년 전이다.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 개념을 다윈과 동시에 발표한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의 <말레이 제도>(지오북, 2017)를 번역하면서였다. 평소 나는 번역을 끝내면 책의 내용을 까맣게 잊는다. 원래 기억력이 좋지 않기도 하거니와 새 책을 시작하려면 머릿속을 비워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낱말은 오래도록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아묵’이 그중 하나였던 것은 살면서 만난 수많은 아묵 때문이다.

‘사이코’라는 별명을 가진(아니면 ‘미친개’였는지도) 선생이 학생들을 제압한 비결은 체벌하다 대걸레 자루가 부러질 정도로 분을 이기지 못하는 성미였다. 선생만 그런 것이 아니다. 교실에서 싸움이 붙으면 의자며 책상이며 마구 집어던지는 친구도 있었다. 그러면 덩치가 더 크거나 싸움을 더 잘하는 녀석들도 그 친구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아묵이 되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진 것 같다. 이른바 ‘묻지마 살인’이나 미국의 총기 난사는 말할 것도 없고 분노를 비합리적 행동의 핑계로 삼는 경우도 종종 눈에 띈다. 어찌 저리도 상대방의 인격을 짓밟을 수 있는지 의아할 때도 있다. 더 두려운 것은 집단적 아묵이다. 과거에 전쟁이 벌어지면 병사들은 아묵이 되었으며 이것은 용인되거나 선호되었다고 한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서 저질러진 만행들도 아묵의 소행인지 모른다. 가진 것을 부당하게 빼앗겼을 때, 아무리 목 놓아 외쳐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을 때, 정당한 몫을 요구했는데 불법이라는 딱지가 붙을 때 사람들은 자포자기한다. ‘자포자기’의 ‘포’가 ‘사나울 포(暴)’라는 사실을 아는지? ‘기’는 물론 ‘버릴 기(棄)’다. 자신을 버리고 스스로 사나워지는 것… 어디서 본 낱말 같지 않은지?

사람이든 자연이든 벼랑 끝에 서 있는 요즘이다. 부디 누구도 자포자기하지 않길. 부디 누구도 아묵이 되지 않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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