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은 부디 칼을 거두시라

김태일 장안대 총장

정월 보름 달빛을 받아 칼이 차갑게 번득인다. 이미 여러 사람을 친 칼이다. 이준석을 자르고, 나경원을 베고, 안철수를 찔렀다. 비빔밥이라는 화려한 개념으로 잡탕 정당을 한 그릇에 담으려 했던 이준석도, 몸 아끼지 않고 정치 현장을 누볐던 보수정당의 오랜 지킴이 나경원도, 정권교체에 자신의 마지막 남은 중도정치 자산을 다 털어 넣었던 안철수도, 바람을 가르는 칼날에 풍비박산했다. 강호 무림의 최고 칼잡이라는 별명에 걸맞은 솜씨다. 칼끝을 겨누기만 했을 뿐인데 유승민은 깊은 내상을 입고 주저앉았다.

김태일 장안대 총장

김태일 장안대 총장

칼은 전후좌우를 가리지 않는다. 앞 정부의 대통령은 물론 비서실장, 국가안보실장, 국정원장, 장관, 청와대 정책 참모, 노동조합, 시민단체 등에도 칼끝이 왔다 갔다. 어떤 이는 칼 등에 맞아 멍이 드는 정도이고 어떤 이는 칼날에 살짝 스쳐 피만 조금 비칠 정도지만 어둠을 가르는 칼의 궤적이 공포인 것은 분명하다. 그 칼끝이 종국에는 대통령 후보였던 야당 대표 이재명을 겨냥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에 두려움은 끝이 없다. 칼이 파고드는 자리도 거칠 게 없다. 앞 정부의 정책, 인사, 말, 판단, 민간단체의 활동 등 모든 곳에 날이 시퍼런 칼이 닿고 있다.

대통령의 권력 자원은 크게 세 가지다. 칼, 돈, 말이다. 물리적 힘이 있어야 하고, 인민의 삶을 추스를 경제적 힘도 있어야 하며,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는 설명의 힘도 있어야 한다. 칼은 꼭 필요한 권력의 수단이라 하겠다. 국가는 폭력의 독점기관이며 합법적으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하지 않는가? 따라서 대통령이 칼을 쓰는 것 그 자체를 문제 삼을 일은 아니다. 그런데 그것은 공정해야 한다. 꼭 사용해야 할 데 써야 한다. 정당성의 옷을 입은 폭력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지금 대통령이 쓰고 있는 칼은 걱정스럽다. 공정한가? 필요한가? 적절한가? 여러 가지 질문을 받고 있다.

이준석을 날려버리고 나경원의 무릎을 꿇리더니 안철수마저 ‘적’으로 몰아붙이자 보수진영 내부까지 술렁이고 있다. 그럴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너무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대통령이 당의 일에 이렇게 벌거벗고 덤비는 건 근 몇십년 정치사에서 보지 못한 장면이다. 칼의 ‘술’은 현란하다고 할지 모르나 그것이 칼의 ‘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민주당을 헤집고 드는 칼날도 걱정이다. 법 앞에 모두가 평등하고 법을 어기면 성역 없이 처벌받아야 하지만, 의뭉한 칼 놀림은, 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뭔가 있으니 저럴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민주당은 피를 흘리며 칼날을 맨손으로 잡고 서 있는 형국이다.

칼자루를 쥔 쪽이 여럿이라는 점도 주목할 일이다. 검찰, 감사원 등 강제적 국가기구들이 망라하여 나서고 있다. 이 기구들이 정치적으로 오염되어 있다는 비판이 강력하다. 대통령이 총장으로 머물렀던 검찰, 원장이 정치판 진입의 디딤돌로 삼았던 감사원이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의심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칼의 잠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함부로 쓰지 말라’는 것이다. 절제가 으뜸 덕목이라는 얘기다. 일전에 ‘조선의 나폴리’로 불리는 경남 통영을 둘러보았다. 여행의 백미는 조선 후기 해군 총사령부라 할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이다.

출입문의 현판 ‘지과문(止戈門)’이 일행의 눈길을 끈다. 멈출 지(止). 창 과(戈). 칼을 내려놓자, 싸움을 그만하자 이런 뜻이다. 초전 박살 같은 구호만 보아 온 터라 전쟁 지휘 본부 출입문에 붙은 글자로는 뜻밖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곧 그 말이 칼 쓰는 사람들의 진정한 꿈을 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止), 과(戈)가 무(武)의 파자(破字)라는 것도 전쟁 지휘부를 드나드는 사람들의 생각을 짐작하게 했다. 제대로 된 무(武)는 칼을 쓰지 않는 경지라 하겠다. 해군 지휘 본부의 객사 현판은 세병관(洗兵館)이다. ‘은하를 길어와 무기를 씻는다.(挽河洗兵)’ 출입문 현판의 취지와 다르지 않다.

칼은 절제해야 하고 그것을 쓰지 않는 것이 칼의 꿈이라 하겠다. 한때 ‘조선 제일의 검’으로 불렸던 대통령도 그러한 칼의 잠언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칼을 쥔 팔뚝의 힘으로 ‘탈탈 털어’ 성공한 대통령은 없다. 지금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건 먹고사는 걱정을 덜어주고 지친 이를 위로해 주는 대통령이다. 대통령은 자신이 칼을 쓰는 이유가 충분히 있다고 할지 모르나 과하다. 대통령은 칼을 거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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