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를 모르는 여자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영화 <아라한 장풍 대작전>엔 봉인된 악의 기운과 맞서는 히어로 ‘마루치’와 ‘아라치’가 등장한다. 영화는 ‘어리버리하지만’ 정의로운 순경 상환이 자기 안에 숨겨진 힘을 찾아 영웅으로 각성한다는 마루치의 성장담이 중심이다. 하지만 중학생 때 이 영화를 본 나는 자신을 희롱하는 치한들을 기세만으로 제압하고, 덩치 큰 폭력배에게 장풍을 쏴서 물리치며, 어둠의 세력을 잡기 위해 고층빌딩 위를 겅중겅중 뛰어다니던 ‘아라치’ 의진에게 더 큰 매력을 느꼈다.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특히 아라치를 연기한 배우 윤소이의 큰 키와 긴 다리, 날렵한 움직임을 볼 때 가슴이 뛰었다. 그가 날아차기를 할 때면 ‘저렇게 되고 싶다!’는 흥분에 사로잡혀서 왜 아저씨들이 이소룡을 말할 때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이 되곤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감동의 눈물만 흘리고 있을 수 없던 나는 극기훈련을 시작했다. ‘극기’라고 하기엔 다소 민망한 달리기, 줄넘기, 턱걸이 정도의 운동이었지만 매일 밤 운동장에서 ‘뿌얍!’‘따핫!’ 같은 정체 모를 기합을 넣으며 무적이 되는 상상을 했다. 덕분에 사춘기 시절 나는 누구와 싸워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이상한 자신감에 취해 살 수 있었다.

최근 몇년 사이 유행하는 싸움 실력을 검증하는 예능이나 군대를 배경으로 한 서바이벌쇼를 보면 유독 ‘사나이답게’ ‘남자니까’ 하는 구호들이 쩌렁쩌렁 울린다. ‘지지 않으려는 승부욕이 남자들만의 전유물인가?’하는 생각이 드는 까닭은 나의 어린 시절처럼 많은 여자들이 육체의 힘으로 ‘세계관 최강자’가 되는 것을 꿈꾸기 때문이다.

<바바야가의 밤>은 여자들의 그런 상상을 극한으로 끌어낸 소설이다. ‘엄청나게 강하고 뭐든 완력으로 때려 부술 수 있는 여자를 그리고 싶었다’는 작가 오타니 아키라의 말처럼 작품은 야쿠자 조직에 홀로 맞설 정도로 강력한 힘과 싸움실력을 가진 여자 신도 요리코가 주인공이다. 요리코는 야쿠자 보스의 외동딸이자 활 쏘기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여자 쇼코를 만나 여자를 위협하는 세상의 물리적 폭력, 관습 및 제도적 억압에 무력으로 맞선다.

여성의 폭력성은 예외적인 것이기에 창작물에서도 ‘미소녀 전사’처럼 성적 대상화의 변주를 위한 도구로 사용되거나 가족을 지키려는 모성을 근거로 삼을 때에만 용인되고는 했다. 그래서 <바바야가의 밤>은 요리코와 쇼코를 통해 여성이라는 약자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폭력의 동기가 될 수 있음을 내세우며, 대부분의 여성들이 피해자로 머무는 남성들의 세계에 그들을 풀어놓고 여성 내면의 순수한 분노를 표출한다.

지난달 방영을 시작한 넷플릭스 <피지컬 100>은 상금 3억원을 두고 가장 강력한 피지컬을 가진 1인을 가리는 서바이벌쇼다. 남성끼리 체력 경쟁을 벌이는 기존 서바이벌과 달리 <피지컬 100>은 출연자들의 합의하에 성별, 체급에 제한을 두지 않고 오래 매달리기, 참호격투, 모래 나르기, 배 끌기와 같은 신체 퀘스트를 실행한다.

참가자인 레슬링 국가대표 장은실은 1차전의 활약으로 10명에게만 부여되는 팀장의 자격을 받았지만, 여성이 가진 근력의 한계를 이유로 대부분의 참가자가 그의 팀이 되기를 꺼린다. 바로 그때 크로스 핏 선수인 참가자 서하얀이 망설임 없이 그의 앞에 선다. 순간 두 사람이 주고받는 눈빛에 불꽃이 타오른다. 결국 모두가 거부한 이들로 이루어진 ‘언더독’팀이 되었지만 둘은 구심점이 되어 팀을 강하게 이끈다.

공생보단 생존이 키워드인 우리 사회에서 액션영화나 서바이벌쇼는 낙오를 당연한 것처럼 여기게끔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복수를 다짐하며 싸움의 화신이 된 여자들과 누구도 함께 힘을 모으려 하지 않는 소외된 여자들이 끝까지 악을 쓰며 싸우는 모습을 볼 때 나는 지지 않기 위해 자신을 단련하고 세상에 시비 거는 모든 약한 존재들의 폭력성에 대해 생각하며 주먹을 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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