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신 파동’이 보여준 ‘검찰공화국’의 미래

김민아 논설실장
윤석열 대통령이 27일 연세대 학위수여식에 참석해 졸업생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김창길 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27일 연세대 학위수여식에 참석해 졸업생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김창길 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27일 연세대 학위수여식에 참석해 축사를 했다. 윤 대통령은 “기득권 카르텔을 깨고, 더 자유롭고 공정한 시스템을 만들고, 함께 실천할 때 혁신은 이뤄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러분은 우리나라의 미래”라며 “산업현장의 노사법치 확립 등 노동, 교육, 연금의 3대 개혁은 여러분의 꿈과 도전에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기 위한 것”이라고도 했다.

김민아 논설실장

김민아 논설실장

최근 집중 타깃으로 삼아온 노동조합을 ‘기득권’으로 상정하고, 미래세대를 노조에 일자리를 빼앗긴 ‘약자’로 대비시키려 한 것 같다. 노동자 내부의 격차를 부풀려, 노동자 대 사용자라는 노동 문제의 본질을 왜곡하려는 언설이다. 혹시 며칠 전까지는 먹혔을지 모른다. 더 이상은 아니다. 지금 한국 사회의 최대 기득권이 누구인가. 길을 막고 물어보라. 열 명 중 아홉 명은 검찰이라 답할 것이다. ‘정순신 아들 학폭 사태’는 결정적 분기점이 되고 있다.

정순신 변호사 아들의 학교폭력-2차 가해-국가수사본부장 임명 과정은 ‘기득권이란 무엇인가’를 선명히 보여준다.

① 기득권은 지식·금전·시간 등 자원이 풍부하다 = 가해자 정씨는 2017년 5월부터 2018년 1학기 초까지 동급생 A씨에게 “돼지XX” “빨갱이XX” 같은 언어폭력을 되풀이했다. A씨가 학교에 신고하자, 학교 측은 정씨에게 강제전학 등 처분을 내렸다. 정 변호사는 재심 청구, 행정소송, 징계효력 집행정지 신청 등 갖가지 법적 수단을 동원해 아들의 전학을 막으려 했다. 소송이 대법원까지 이어지는 1년간 A씨는 가해자와 마주치며 고통에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까지 시도했다. 법조계 이너서클을 파헤친 <불멸의 신성가족>에는 한 철학자의 말이 나온다. “학벌중심사회에서 상류계급이 예전에 비해 훨씬 더 자기중심적이고 뻔뻔해져가고 있다.” 적확하다. 정 변호사 부부는 지금도 ‘아들을 구할 수 있는 자원이 있는데 손놓고 있으란 말이냐?’며 억울해할지 모른다.

② 기득권은 욕망을 제어하지 않는다 = 2018년 11월 KBS가 이 사건을 보도했다. 가해자 아버지의 실명은 나가지 않았지만 ‘고위직 검사’임은 적시됐다. 평범한 시민은 소송에서 지고 언론 보도까지 나갔으면, 더 이상의 공적 욕망은 접게 마련이다. 아들이 무사히 서울대에 들어간 걸로 만족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대통령과 가까운 ‘초(超)기득권’은 다르다. 정 변호사는 경찰 2인자인 국가수사본부장에 당당히 지원한다. 검사 출신이 국수본부장에 지원하면 언론의 주목을 받을 걸 모르지 않았을 터다. 그는 대검찰청 부대변인을 지내는 등 검찰 내에서 공보 분야 전문가로 꼽혔다.

③ 기득권은 ‘뒷배’가 든든하다 = 5년 전 KBS 보도 당시 정 변호사는 서울중앙지검 인권감독관이었다. 윤 대통령은 서울중앙지검장,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서울중앙지검 3차장검사였다. 대통령실과 법무부는 부인하지만, 윤 대통령과 한 장관 모두 학폭 사건을 인지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정 변호사는 법무부 인사정보관리단의 1차 검증, 검사 출신 이시원 비서관이 이끄는 대통령실 공직기강비서관실의 2차 검증을 사뿐히 통과했다. 공식 추천권자인 윤희근 경찰청장이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고만 할 뿐 사과하지 않은 건 대통령실·법무부를 향한 ‘소심한’ 반발일지 모르겠다.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2018)에 썼다. “트럼프 대통령 임기 1년 동안 이뤄진 규범 파괴는 전임자들 경우와 차원이 달랐다. 트럼프 취임 후 미국 사회는 정치적 일탈을 정의하는 기준을 하향 조정했다. 지금 미국인들은 예전엔 스캔들이라고 생각했을 사건에 익숙해지고 있다. 규범은 민주주의를 보호하는 연성 가드레일이다.”

검찰 출신 대통령이 낙점하고, 검찰 출신 법무부 장관과 공직기강비서관이 검증하면 어떤 인사가 이뤄지는지 시민은 목격했다. 학폭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일삼은 인사가 ‘전직 검사란 이유만으로’ 3만명이 넘는 국가 수사경찰의 수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과정은 검증이라 부를 수 없다. 끼리끼리 밀어주고 끌어주는 ‘내부거래’일 뿐이다.

윤 대통령은 취임 후 9개월 사이 대통령에게 요구되는 행동 규범을 줄줄이 깨뜨렸다. 검찰공화국을 만들고, 여당 대표 경선에 노골적으로 개입하고, 출입기자의 전용기 탑승을 거부했다. 레비츠키·지블랫은 말했다. “일탈의 용인은 끔찍한 결과를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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