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진아, 인생엔 인과응보가 있어읽음

이명희 사회에디터

“왜 없는 것들은 인생에 권선징악, 인과응보만 있는 줄 알까.”

학교폭력을 다룬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 파트2 예고편에 나오는 연진(임지연)의 대사인데, 그저 그런 인생을 사는 대다수 사람들이 듣기엔 분노보다는 힘이 쭉 빠지는 말이다. 온 생을 걸고 ‘사적 복수’에 나선 학교폭력 피해자 동은(송혜교)을 맞닥뜨린 가해자 연진은 사과는커녕 경고를 날린다. 그러곤 동은을 조롱한다. “용서? 누가 누굴?” “난 잘못한 게 없어 동은아.”

이명희 사회에디터

이명희 사회에디터

태어날 때부터 그들만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연진이 끔찍한 학교폭력을 당해도 기댈 곳 하나 없는 동은의 시린 시간을 알 리가 없다. 실은 시청자들도 알고 있다. 복수는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그래서, 드라마 밖 또 다른 피해자의 이야기에 분노가 치민다. 현실에선 검사 아버지만 믿고 안하무인이던 아들이 학교폭력 전력에도 서울대에 진학했다. 법 전문가인 아버지가 피해 학생을 상대로 ‘끝장 소송’을 벌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연진의 말이 들리는 것 같다. ‘거 봐, 인과응보는 없다니까.’ 비록 아들의 학폭 사건이 알려져 국가수사본부장에 임명됐던 아버지(정순신 변호사)가 하루 만에 낙마했다곤 해도 죽음보다 힘겨운 고통을 받은 피해 학생의 삶은 달라질 게 없다. 폭력을 견디다 못해 극단적 선택까지 시도했던 피해 학생은 지금까지도 지워지지 않는 흉터를 끌어안고 살아가고 있을 테니. 정 변호사는 그저 감투 하나를 내려놓았을 뿐이다. 그나마 이런 인식을 가진 인물이 전국의 경찰 수사를 총괄하는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이미 알려진 대로, 2017년 자율형 사립고등학교에 다니던 정 변호사 아들은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하던 동급생에게 “빨갱이 XX” “넌 돼지라 냄새가 난다” 등 언어폭력을 가해 전학 처분을 받았다. 당시 현직 검사였던 정 변호사는 아들의 학교생활기록부에 징계 기록을 남기지 않기 위해 대법원까지 소송을 끌고 간 끝에 최종 패소했다. 그 기간에 그의 아들은 “아빠는 아는 사람이 많다” “판사랑 친하면 재판에서 무조건 승소한다”며 동급생들에게 아버지의 권력을 과시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정 변호사의 낙마는 누가 뭐래도 ‘인사 참사’다. 임명 하루 만에, 정 변호사가 물러났지만 국민의 분노는 쉬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단순 ‘인사 참사’가 아니라 검사 아버지가 ‘법 기술’을 동원해 2차 가해를 했기 때문이다. 정치권에서도 비판이 쏟아졌다. 지난달 27일 국회에서 열린 교육위원회에서 문정복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성별만 남자로 바뀐 연진이가 나오는 ‘글로리 시즌2’를 시청하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정 변호사의 아들 학폭 문제는 인사검증 과정에서 마땅히 걸러졌어야 한다. 대통령실은 진화에 나섰지만 부실 검증에 대한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안 그래도 경찰 수사조직의 수장 자리에 검사 출신을 임명하면서 비판이 제기됐다. 추가 조치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다. 온라인에는 정 변호사 아들의 입학 취소를 요구하는 글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주말 트위터에는 학폭과 관련해 “학폭 사실이 생기부에 기입되지 않도록 소송으로 시간을 끌었다면 대입 이후에도 소급하여 입학처분을 취소할 수 있는 ‘정순신법’ 입법이 시급하다”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실제로 교육부는 대입 정시모집에도 학폭 가해 이력을 반영하는 방안을 검토한다.

정순신 사태에 비판 여론이 들끓은 것은 ‘학폭’ 문제에 ‘부모 찬스’라는 우리 사회의 민감한 두 화두가 겹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정의 잣대를 들이대기에 앞서 학폭의 심각성을 돌아봐야 하는 시점이다. 지난해 교육부가 실시한 ‘2022년 1차 학교폭력 실태 조사’를 보면, 학교폭력을 당했다고 응답한 ‘피해 응답률’은 1.7%로 조사됐다. 전수조사가 시작된 2013년(2.2%) 이후 두 번째로 높은 수치다. 신고 비율이 낮아 드러나지 않은 피해자들은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학교폭력은 피해 학생이 또 다른 가해자가 되면서 폭력이 재생산되는 악순환을 거듭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교육부에 학교폭력 근절 대책을 주문했다고 한다. 그동안 온갖 대책이 쏟아졌지만, 대책은 여전히 현실을 따라가지 못했다. 이번에도 학폭 가해 사실 생활기록부 등재 등의 미봉책을 제시하는 것으로 넘어가려 해선 안 된다. 학폭은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부모의 태도다. 영화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는 경고한다. ‘자식이 괴물이 되면 부모는 악마가 된다’고. 내 자식 미래가 중하다고 남의 자식의 피눈물을 그냥 흘려보내서는 안 될 것이다. <더 글로리>의 연진 같은 괴물은 부모가 만든 것이나 진배없다. 아이들을 건강하게 키워내지 못하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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