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네가 이러고 있을 때야?” “지금 우리가 이러고 있을 때입니까?” 주제와 상황은 다를지라도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봄 직한 말일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을 가장 많이 들은 연령대는 아마도 성인이 되기 직전의 청소년과 성인이 된 지 얼마 안 된 청년이다. 그들에게 현재는 더 좋은 대학을 준비할 ‘때’, 더 좋은 직장을 준비할 ‘때’, 즉, 불평하지 말고 미래를 위해 인내할 ‘때’이다. 하지만 대학에 가고, 졸업 후 취업한다고 해서 과연 기다리던 ‘때’가 쉽사리 나타나지는 않는다. 경제적 여건과 배경에 따라 ‘때’의 결과는 다르게 실현되곤 한다.
시간에 대한 정의는 물리적 사실을 넘어선다. 미국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시간을 문화연구의 대상으로 보며 크게 모노크로닉한(monochronic, 단일적인) 시간과 폴리크로닉한(polychronic, 다원적인) 시간으로 구분 지었다. 홀은 서구(특히 미국)의 경우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선’으로 받아들이며 스케줄에 따른 계획적 삶을 중요시한다고 말한다. 반면,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시간을 ‘점’으로 받아들이며 다양한 인간관계가 중심이 된 삶을 중요시한다고 설명한다. 더 나아가 미국인은 시간의 흐름을 직선으로 이미지화해서 시간을 지배하고 관리하며 절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보았다.
반면, 홀은 인디언(특히 호피족의 경우)이 ‘영원한 현재를 산다’라고 보았다. 그들에게 시간은 ‘점’이고, 그 점은 곧 토지와 계절의 변화에 따라 반복되는 현재로 경험되었다. 그들의 삶의 중심에는 미래의 스케줄이 아니라 종교가 중심이 되었다. 여기서 종교란 계절마다 개최되는 신성한 의례와 성인식과 같은 입문 의례를 뜻했다. 즉, 인위적 시간표가 아닌 자연스러운 환경과 사람의 변화에 따른 성스러운 환대의 일상이었다. 그들에게 미래의 스케줄을 위해서 현재를 희생하는 강박증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다시, 한국의 ‘때’로 돌아와 보자. 한국인의 삶은 인디언보다 홀이 묘사한 미국인의 모노크로닉한 시간과 매우 닮았다. 어쩌면 시간관념에 있어서만큼은 미국인보다 더욱 미국인다울지도 모른다. 잡히지 않는 미래의 ‘때’를 위해 어린 시절부터 끊임없이 목표를 세우고 채워나가기 바쁘지 않은가. 성인이 되어간다는 축복보다는 이름보다 앞에 적힐 대학의 명패가 더욱 우상시된다.
그렇게, 명예로운 ‘때’를 위해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고 살기를 종용하지만, 그로 인해 항상 시간이 ‘부족한’ 삶에 익숙해진다. 최근 한국 사회를 ‘시간빈곤’(시간 자원의 부족), ‘이중빈곤’(경제 자원 및 시간 자원의 부족)의 개념으로 설명하는 시도들은 모두 이러한 모노크로닉한 시간관념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중앙대 이승윤 교수(사회복지학과)는 최근 논문에서 한국의 여성 노동자, 비숙련 서비스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가 이중빈곤에 취약하다고 지적한다. 기존 국내연구에서도 시간빈곤은 여성과 저학력 집단에서 공통적으로 가장 취약하다고 보고된다. 결국 경제적 빈곤을 극복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노동에 할애해야 하는 사람들이 다시금 시간빈곤에 빠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시간빈곤이란 절대적인 시간의 양도 부족하지만, 시간의 질도 열악한 상태를 말한다. 즉, 시간에 대한 주권(재량시간)도 부족하다는 뜻이다. 언제 일을 하고 언제 휴식을 취할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삶 말이다.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 시간에 대한 스케줄은 대부분 사회가 정해준 ‘때’에 따라 크게 좌지우지된다. 사회는 학교에, 입시에, 취업에, 그리고 성과에, 인생 과업에 충실할 ‘때’를 결정해 준다. 최근 정부는 3월6일 ‘근로시간 개편 방안’을 발표하며 새로운 ‘때’를 제시했다. 골자는 기존 주당 52시간 노동의 제한을 없애고 연장근무 한도 규정을 확대 개편한다는 내용이었다. 기업과 노동자가 서로 더 많은 이윤을 위해 더 많이 일할 ‘때’라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결정이 노동자의 실질적 임금 수준의 확대와 삶의 질 개선에 얼마나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바지할지 우려스럽다.
이미 한국 사회는 충분히 시간빈곤 및 이중빈곤에 빠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더 많은 노동시간의 자율적 선택이란 시간빈곤의 악순환은 물론 건강의 손상으로 귀결될 가능성도 커질지 모른다. 왜 한국 사회는 시민에게 재충전할 ‘때’를 허용하지 않는 것일까. 계절이 바뀌는지도 모른 채, 자녀의 졸업식에도 참석하지도 못한 채, 우리는 도대체 누구의 ‘때’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고 있는지 되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