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등급 시민의 민주주의

정유진 국제부장

이스라엘은 분리장벽 너머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철저히 억압하고 차별하는 것으로 악명 높지만, 장벽의 경계선 안쪽에서만큼은 중동 지역 유일의 민주주의 국가로 불려왔다. 물론 이스라엘을 민주국가로 볼 수 있을 것이냐는 중요한 논쟁거리가 되겠으나, 삼권분립 등 형식적 민주주의 체제를 갖추고 있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그러하다는 얘기다.

정유진 국제부장

정유진 국제부장

이 나라의 강력한 유대인 공동체는 서로를 “형제”라고 부르는 수준의 끈끈한 연대를 자랑해 왔다. 그러므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유대인들 간의 격렬한 충돌은 전례가 드문 일이다.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과 ‘분쟁’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단어의 한 쌍이었지만, 그 분쟁은 주로 인종과 종교로 쌓아올린 장벽 바깥과의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11일(현지시간) 주최 측 추산 50만명의 이스라엘 시민들이 거리로 나섰다. 이스라엘 역사상 최대 규모였다. 사람들은 “이대로 가면 이스라엘은 완전한 독재국가가 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학에서, 직장에서, 공항에서, 거리에서, 이스라엘의 반정부 시위는 벌써 11주 연속 이어지고 있다.

발단은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이끄는 극우 연정이 추진하는 사법개혁안이다. 이 개혁안은 대법원이 내린 위헌 결정을 의회의 단순 과반 의결만으로 뒤집을 수 있게 한다. 대법원이 기본법에 반하는 법안에 제동을 걸려 할 때 반대하는 대법관이 1명이라도 있으면 의회가 단순 과반 의결로 문제의 법안을 밀어붙일 수 있도록 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삼권분립의 원칙을 정면으로 허물려 하는 대범한 시도다.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은 “사법개혁안이 통과될 경우 특히 아랍계 이스라엘 시민, 망명 신청자, LGBT 등 가장 취약한 사람들의 인권이 더욱 약화될 위험이 있다”며 우려를 표했다. 네타냐후의 사법개혁안이 유대인들에게 ‘재앙’이 될 것이라면, 아랍계 시민들에게는 ‘파멸’이 될 것이란 얘기다.

그런데 현재 시위에 나선 이들 중 이스라엘 인구의 20%를 차지하고 있는 아랍계 시민들은 정작 찾아보기 어렵다. 가디언에 따르면 저명한 유대인 정치인들과 전직 경찰 및 군 관계자 등이 “친팔레스타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과 시위대 연단을 공유해야 한다면 연설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석 달 가까이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모여 시위를 벌이는 동안 연단에 오르는 것이 허락된 아랍계 시민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연설 내용을 사전에 검열당해야 했다. 시위대는 아랍계를 끼워줄 경우 유대인들의 지지가 분열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함성이 가득한 거리에서조차 소외되고 배제된 이들은 실망한 채 떠나갔다.

그러니까 지금 이스라엘에서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는 이 시위는 어찌보면 ‘1등급 시민들의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인 것이다. ‘1등급 시민’과 ‘민주주의’는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같이 말이 되지 않는 조합이지만, 이것이 중동 유일의 민주주의 국가라는 이스라엘의 현주소이다.

시위대가 지켜내려고 하는 이스라엘의 민주주의는 과연 어떤 것일까. 지금도 이스라엘 사법 체계는 유대인 정착민의 불법 행동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 하레츠에 따르면 2018~2020년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유대인의 형사사건 중 기소가 이뤄진 것은 3.8%에 불과하다. 이스라엘 예비역 장교 750여명은 “독재정권에서 복무할 수 없다”며 동원령을 거부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사법개혁안이 통과되지 않은 현재도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거주지에 불을 지르고 총을 쏘는 유대인 정착민들을 엄호하고 지원하는 불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차별의 폭압적 작동 기제는 전기 스위치처럼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대상에게만 껐다 켰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성질은 마치 액체와도 같아서 아무리 장벽을 세워 차별 대상자와 나를 분리한다 한들 기어이 틈새로 흘러들어와 이쪽까지 잠식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 바로 이스라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이스라엘 극우 정부는 ‘시오니스트’가 아닌 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썼던 수사를 그대로 차용해, 사법개혁안에 반대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진짜 시오니스트’와 ‘가짜 시오니스트’를 가려내야 한다며 섬광탄과 물대포를 쏘고 있다.

이스라엘의 사법개혁 저지 시위를 응원한다. 동시에 소수자의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는 결국 다수의 인권 역시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이번 사태를 통해 이스라엘이 진정한 민주주의로 나아가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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