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수 시인
[詩想과 세상] 모란

1
강둑에 앉아 낚시하다가
뭐라도 걸리면
우쭐해서
식구들에게 자랑하며 나눠 먹고 자랐는데

물고기를 실컷 잡아 놓고
풀어 주는 사람이
친구 하자고 다가오면

영 거슬린다 낚시를 재미로 하는 것이

2
수도를 틀어
숭어를 씻는데
주둥이를 씻고 있는데

돈 받으러 온 남자가 수도꼭지를 잠근다

빚은 빚인데

숭어와 물을 들고 간다

석민재(1975~)

첫 직장의 마당이 꽤 넓었다. 마당 한 귀퉁이에 커다란 모란 여러 그루가 있었다. 늦은 봄에 핀 붉은 꽃이 무척 소담스러웠다. 꽃송이를 보고 있으면 왜 모란을 ‘꽃 중의 왕’이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 시 제목을 보는 순간 그 장면이 먼저 떠올랐다. 한데 내용은 모란이 아니라 낚시 이야기다. 시적 화자는 “강둑에 앉아 낚시”를 한다. 물고기를 잡으면 “우쭐해서” “자랑하며” 식구들과 나눠 먹고 자란다. 강가에 사는 사람들의 특별할 것 없는 일상적인 삶이다.

변변찮은 장비로 물고기를 낚는 건 쉽지 않지만, 그마저도 꼭 필요한 만큼만 잡는다. 한데 취미로 낚시를 하는 사람은 ‘실컷’ 잡았다가 놓아준다. 생존을 위한 살생과 재미로 잡았다 방생하는 것은 차이가 크다. 친구가 될 수 없는 관계다. 물고기를 손질하는데 “돈을 받으러 온 남자가 수도꼭지를 잠”가버린다. 한 끼 양식인 숭어를 빚 대신 가져간다. 모란은 부귀를, 숭어는 빼어난 물고기(秀魚)를 의미한다. 가난해도 최소한의 품위만큼은 지키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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