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노동자여, 연대하라

황규관 시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구로공단에 있는 안테나 공장에 첫 출근을 할 때 이야기다. 그때가 1987년 봄이었으니 우리 역사에서 큰 분수령이 있던 때이기도 했다. 오후 5시가 조금 지날 무렵 공장 주임은 내게 철야를 할 수 있겠냐고 물었는데, 차마 못하겠다고 할 수 없었다. 이제 사회 초년병에게 그것을 거절할 배짱도 없었지만 그 당시에는 그게 거의 강요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침에 출근해서 다음날 아침에 퇴근하게 되었고 나는 그 공장에서 얼마 동안 주야 맞교대를 하며 살았다. 맞교대를 피하고 싶어 다른 공장도 전전했으나 작은 장난감 공장 말고는 맞교대 아닌 데가 없었고, 그게 무슨 운명의 전조였는지 제철소에서 일할 때도 동기들과는 달리 나는 3교대 근무를 하는 부서에 배치되고 말았다. 나중에 새삼 헤아려 보니 맞교대하는 공장에서 일주일에 72시간을 일했던 것이다.

황규관 시인

황규관 시인

윤석열 정부가 주 최대 52시간 노동시간을 필요에 따라 몰아서 주 6일 기준 69시간까지 일을 몰아서 시킬 수 있도록 법을 바꾸겠다고 예고했다. 한동안 ‘주 69시간’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자 내 기억과 몸은 예전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사실 문재인 정부 때 힘겹게 만들어진 주 52시간 노동도 적은 게 아닐 정도로 대한민국은 노동시간을 줄여야 할 시대적 책무를 이행할 생각이 없는 나라다. 사회 일각에서는 창의성을 말하지만 기업이나 정치권력은 노동자가 창의성을 발휘하는 것을 원치도 않으며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기업 입장에서 도움이 되는 ‘효율성’일 뿐이다. 창의성이 뛰어난 노동자는 통제되지도 않으며 복종하지도 않는다.

노동시간 뜻밖 반전에 쓴웃음만

1848년 잉글랜드에서는, 아동과 18세 미만 미성년자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을 10시간으로 줄이는 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키자 도싯주와 서머싯주의 방적 공장 공장주들이 부모들에게 반대 청원을 넣으라고 압박한 일이 있었다. 노동을 하지 않는 그 시간만큼 나태해지기 마련이고, “나태는 모든 퇴폐의 근원”이라는 주장이었다. 이 일을 진행하기 위해 공장주들은 부모들에게 갖은 간계와 술책을 부렸고, 심지어 협박하거나 서명을 위조하기도 했다. 공장주 입장에서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을 반대한 나소 시니어라는 옥스퍼드대 경제학 교수는 이를 ‘최후의 한 시간’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공장의 이윤이 바로 이 ‘한 시간’에서 나온다고 분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한 시간’은 초과 이윤을 위한 탐욕의 시간에 지나지 않았다. 윤석열 정부에 몰아서 일 시키는 방식을 제안한 이른바 전문가들의 생각도 나소 시니어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뜻밖의 반전이 일어났다. 이른바 MZ노조라는 ‘새로고침노동자협의회’가 반대를 하자 대통령이 신속하게 주 60시간을 넘지 않게 하라고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이다. 물론 정부는 원점 재검토가 아니라는 입장이지만 다시 한번 대통령의 무책임과 무능력을 확인하면서 쓴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노동자의 건강과 생명이 달린 문제를 아무런 의견 청취 없이 일방통행식으로 진행하다가 자신들의 정치적 ‘우군’으로 여기는 이들에게서 반대 목소리가 나오자 주춤하는 모양새도 참으로 저급해 보이기 때문이다. 현 정권이 그동안 보여줬던 노동조합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와 혐오 감정에 비쳐 보면, 참으로 관대하고 너그러운 조치처럼 보인다. 그래서 한 번 더 웃고 말았다.

노동시간과 노동자의 건강과 생명의 함수 관계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렇게 어려운 문제 풀이도 아니다. 다행히 이런 문제의식이 점점 공유되고 있어서인지 노동시간 개편의 목적이 “건강권과 휴식권을 보장하기 위함”이라는 말은 한다. 당연히 이 말은 거짓말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거짓말이 참말이 되는 경이’(김수영)는 오늘날 너무 자주 목격된다. 거짓말을 널리 퍼뜨려 참말과의 구분을 흩트려 놓는 속임수는 이제 정치의 기초 문법이 된 것만 같다. 민주주의의 위기를 말할 때, 그것의 위험한 결과이면서 동시에 원인 중 하나는 바로 언어의 오염이다. 오염된 언어 환경에서는 우리의 이성이 일대 혼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데, 이럴 때일수록 사태의 맥락을 좀 더 오래 보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이성의 분열 또한 심각한 질환을 낳기 때문이다.

기성세대 못한 일 MZ가 해내길

MZ세대의 노동자들이 지금 현실에 대한 총체적이고도 깊은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활발한 토론과 행동을 해줬으면 한다. 이는 아직도 장시간 노동을 없애지 못한 기성세대의 책임 떠넘기기가 아니다. 도리어 깊은 책임 통감에서 나온 말이며, 기성세대가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냄으로써 기성세대를 넘어서는 보람과 긍지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감히 말하건대 대한민국의 청년 노동자여, 연대하라. 잃을 것은 장시간 노동뿐이고 얻을 것은 푸르른 사랑과 우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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