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하다’는 답변과의 싸움읽음

김민하 정치평론가

한·일 정상회담의 성과를 강조하는 정권의 논리는 크게 두 개다. 첫째는 ‘일본도 깜짝 놀랄 정도의 양보’를 했기 때문에 결국 기시다 정권의 태도 역시 변화하리라는 것, 둘째는 전 정권이 워낙에 한·일관계를 크게 망쳐 다른 방도가 없었다는 거다. 그런 맥락에서 이들은 다시 한 번 외친다. “반일 죽창가 타령을 멈추라!” “제발 식민지 의식에서 벗어나자!”

김민하 정치평론가

김민하 정치평론가

전 정권이 한·일 간 대립구도를 선거에 활용한 건 일부 사실이다. ‘총선은 한·일전’류의 구호가 이를 대표한다. 더불어민주당은 크게 달라진 거 같지 않다. 이완용, 매국노, 을사늑약이 거론되는가 하면 “경술국치에 이은 계묘국치”라는 주장도 나온다. 일본의 식민지배 역사를 다시 떠올리게 하는 어법이다.

양대 세력은 한동안 친일이니 반일이니 하는 말폭탄을 주고받으며 대립할 거다. 늘 그래왔으니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정권이 이 대립 구도를 상기하는 걸로 한·일 정상회담에 대한 평가를 대신하려는 건 ‘무성의’다. 지금 직시할 것은 ‘제3자 변제’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는 사람들도 이번 정상회담 결과는 납득하기 어렵다고 본다는 점이다.

‘제3자 변제’는 당사자 동의가 있어야 한다. 생존 피해자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겠지만, 정작 이들은 정부 해법을 거부하고 있다.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구상권을 행사할 생각은 없다고 못 박아 말했다. 채무자 격인 일본 전범기업은 애초에 채무 자체가 없다 한다. 모든 당사자가 ‘제3자 변제’라는 틀을 거부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이건 ‘변제’라기보다는 피해자들의 권리를 소멸시키는 절차라고 하는 게 실체적 진실에 부합한다. 그렇다면 정부가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확보했다고 말하는 ‘국익’은 피해자들의 권리를 짓밟고 손에 넣은 거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국익’조차도 제대로 확보가 된 것인지는 여러 면에서 의문이다.

물론 어떤 미래의 특정 시점, 특정 주제에 있어선 이번 정상회담의 성과가 결실을 맺는 일도 있을 수 있다. ‘국익’ 논란은 계속 이어질 거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봐야 할 것은 한국과 일본의 국가 간 손익 문제로만 이 사안을 봐서는 근본을 놓칠 수 있다는 거다. 강제동원 문제의 바람직한 해결 방법은 국가 또는 그에 준하는 단체가 전쟁을 빌미로 개인에게 준 피해를 어떤 방식으로 구제할 것인지, 그러한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공동체가 모색하는 과정에서 도출되어야 한다. 전자에 대해선 피해자들이 이미 답을 내놨다. 일본 정부든 전범 기업이든 가해자의 사실 인정과 사과가 전제되면 배상 책임에 있어서는 얼마든지 유연해질 수 있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후자는 결국 강제동원이 군국주의에 의한 피해라는 점에서 군사적 대립 구도의 강화가 아니라 평화체제를 지향하는 공간을 형성하는 걸로 구현해야 한다. 한·일 간 과거사 갈등은 이 두 가지 축을 기본으로 해결책을 찾아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데 이번 정상회담은 이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근본적으로 부정했다. 그게 가장 큰 문제다.

한·일 정상회담을 둘러싼 갈등은 세계관의 대립 구도를 보여준다. 한쪽에는 국가의 안보와 경제의 효율적 발전이 전부이며 이를 위해서는 개인의 피해는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다고 보는 세계관이, 다른 한쪽에는 이를 부정하는 세계관이 자리잡고 있다. 친일이냐 반일이냐의 정파 대립구도는 이러한 세계관 대립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소모적 논란은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이 지긋지긋한 함정에서 빠져나오려면 정권의 책임 있는 태도 변화와 함께 “2차대전 시기 제국주의와 재벌기업에 착취당한 피해자들이 합당한 대우를 요구하는 데에 함께하자”며 일본 시민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정치가 절실히 필요하다. 가능할까? ‘불가능하다’는 답변과 싸우는 것이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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