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언어의 쓸모

전주희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

‘몰아쳐서 일하고 몰아쳐서 쉬는’ 시간으로 삶을 재구성하기 위해 윤석열 정부가 ‘노동개혁’을 시작했다. ‘윤석열표 노동개혁’의 핵심은 불규칙적인 노동시간의 확대다.

전주희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

전주희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

주 69시간이든, 윤 대통령이 여론 수습용으로 발언한 주 60시간이든 핵심은 노동시간 유연화에 따른 발작적인 장시간 노동의 확대다. ‘유연한 노동시간’은 일이 몰릴 때마다 집중적인 노동을 강제한다. 이는 야근으로 이어져 노동시간을 늘릴 뿐만 아니라, 한시라도 빨리 일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발적인 노동강도 높이기를 강제한다. 결과적으로 현재 논란이 되는 노동시간 정책은 유연화를 추진하는 것만으로 장시간 노동과 불규칙 노동 둘 다를 거머쥐게 된다. 그런데 이를 관철하기 위해 윤석열 정부는 기괴하게도 선택권, 건강권, 휴식권 보장과 같은 권리의 언어를 선택했다. 이러한 말들은 모두 오랫동안 노동자들이 거리에서 일터에서 외쳐온 말들이다. 임금을 대가로 수행하는 노동시간조차 기업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도록, 다시 말해 ‘노예노동’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최소의 권리가 법으로 규정되어 있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에 따르면 초기 신자유주의 프로젝트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진보의 언어가 포장지 역할을 해야 했고 그제야 신자유주의는 지배적인 이념이 될 수 있었다. 약탈적이고 폭력적인 정책일수록 ‘정의’의 장식물이 없이는 강한 반발을 야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정의’의 외양을 쓰고 등장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오늘날 도처에서 이뤄지고 있는 삶의 위협과 무시 그리고 혐오의 언어는 정의의 가치를 내부에서 허물고, 정의의 언어들을 탈취하며 등장한다. 공정의 이름으로 공정을 허물고, 평등의 이름으로 소수자의 권리를 부정하고, 노동개혁의 이름으로 노동을 하찮고 비천한 것으로 만든다. 화물연대 파업을 ‘귀족노조의 생떼’라고 비난했을 때, MZ노조들의 이야기를 듣겠다며 민주노총과 노동약자를 가르고 갈라치기 했을 때, ‘노동약자’의 입장에서 노동시간 유연화를 추진한다고 했을 때, 밀려오는 것은 정부의 반노동적인 태도에 대한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어떤 모욕감이다. 정권의 장식물로 전락한 권리의 말들, 연대의 몸짓이 분할과 선별의 언어가 되는 것은 거리의 구호가 제도로 수용되었을 때의 변형과는 다른 것이다.

‘1일 8시간’이 경직된 것으로 폄하되고, 시간 선택권을 기업에 쥐여주는 것이 ‘노동시간 유연화’로 추앙받으며 신노동정책으로 추진된 지 20년이 지났다. 이제 그 유연성을 더 유연하게, 월·분기·반기·연 단위로 화끈하게 열자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런데 여기에 윤석열 정부의 패착이 있다. 정부가 선택한 건강권의 언어가 오히려 노동으로 피폐해진 삶의 불만을 들춰냈다. 60시간이냐 69시간이냐 어긋난 말들이 논란의 핵심은 아니다. 독일식 모델이 어떻든 간에 우리의 신체에 각인된 것은 지난 20년간 ‘노동시간 유연화’가 삶의 질을 악화시켰고, 더욱 과로하게 만들어왔다는 점이다. 정치와 삶의 균열이 장식물 따위로 봉합되고 수용되기 어려운 지경에서 정권이 빼앗아 내뱉은 권리의 말들이 오히려 투명하게 정권의 의도와 우리의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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