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송두율 칼럼] 돈과 예술

포르투갈의 남쪽 해변마을로 이주하고 나서 자동차로 2시간 반 정도 걸리는 리스본을 둘러보려는 계획이 코로나19로 말미암아 차질이 생겼다. 바다와 더불어 지내는 조용한 삶에도 때로는 도시가 불러오는, 또 다른 정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유럽 예술의 중심도시 중 하나로 부상한 베를린과는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이베리아반도의 한구석에서 그 나름대로 가꾸어 왔던 문화와 예술의 모습을 보고자 우선 택한 곳은 ‘켈루스트 굴벤키안’(1869~1955)의 이름을 지닌 음악당과 박물관이다.

마침 베를린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곡가 진은숙의 첼로협주곡과 유대인이라 미국으로 망명 길을 떠나야만 했던 오스트리아 작곡가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의 <서정적 교향곡> 연주가 있어 음악당을 먼저 찾았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의 시를 주제로 삼은 이 곡은 중국 당나라 이태백의 시를 주제로 삼았던, 그의 경쟁자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대지의 노래>에 대한 하나의 화답이었다.

‘검은 금’이라고 불리는 석유로 일어선 미국의 억만장자 존 록펠러는 잘 알려진 이름이지만 같은 종류의 사업에서 성공한 굴벤키안은 생소한 이름이다.

스위스 출신의 극작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1921~1990)의 희곡 <노부인의 방문>(1956)의 주인공 이름은 당대 유럽의 억만장자 세 사람(무기상 자하로프와 선박왕 오나시스 그리고 굴벤키안)의 이름을 합성한, ‘자하나시안’이다.

실연의 설움을 안고 고향을 떠나서 뒤에 고급 창녀로 거부가 된 그녀는 고향 사람들에게 자신을 배신했던 옛 애인을 살해하는 대가로 10억마르크를 희사하겠다고 제의한다. 처음에는 이 비인도적인 제의에 분개하고 거절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마음은 돈으로 쏠렸다. 그들은 차기 시장 물망에까지 오른 옛 애인의 구명운동을 외면하고 그의 살해에 동조하면서 자신들의 변심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한다. 자하나시안은 심장마비로 죽은 옛 애인의 시체와 함께 고향을 떠난다는 줄거리다. 인간은 도덕과 양심도 포함해서 무엇이든지 돈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그린 비극적 희극이다.

굴벤키안, 공공 목적 박물관 세워

굴벤키안은 튀르키예의 이스탄불에서 아르메니아 출신의 석유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런던의 킹스 칼리지에서 석유공학을 공부했고 후에 영국시민권도 취득했다. 1895년부터 본격적으로 석유채굴사업에 뛰어들었으나 다음해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학살로 전 가족이 이집트로 피신했다.

그는 1907년 석유회사 로열 더치와 셸이 합작, 새로 설립된 회사의 5%의 지분을 확보할 수 있어 ‘미스터 5%’라는 별명을 얻었다. 1912년에는 이라크에 설립된 튀르키예 석유회사 설립에도 5%를 투자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오스만튀르크 제국이 붕괴하고 이라크가 영국의 통치에 들어가자 굴벤키안은 자신의 석유채굴권을 끈질기게 요구해서 관철했다. 이 지역에서 새로운 유전이 발견되면서 그는 계속 5%의 권익을 누릴 수 있어 막대한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젊은 시절부터 예술작품에 관심이 있었고 프랑스와 영국에서 교육받았던 그는 사업관계로 유럽을 누비면서 동양과 서양, 고대와 현대를 아우르는 6400여점의 예술작품을 수집했다. 1942년 주로 파리에 소장했던 이 작품들을 2차 세계대전 때 중립국이었던 포르투갈의 리스본으로 옮겼다.

그의 유언에 따라 예술, 교육, 과학의 연구지원과 자선사업을 총괄하는 ‘굴벤키안 재단’이 1956년에 설립되었고 박물관과 음악당은 1969년에 개관했다. 석유채굴사업으로 시작해서 모았던 재산을 2019년에 완전히 정리했다.

독일의 전 총리 메르켈이 심사위원장을 맡았던 제1회 ‘굴벤키안 인도주의 상’은 2020년 당시 17세였던 스웨덴의 젊은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에게 수여되었다. 이 당찬 소녀는 상금 100만유로를 기후와 환경 위기에 대응하는 여러 프로젝트에 기부할 것임을 밝혔다. 화석연료로 엄청난 부를 모았는데, 그로 말미암아 생긴 재앙에 대한 하나의 사죄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물관에 전시된 약 1000점의 작품 가운데 중국과 일본과 달리, 아쉽게도 한국의 작품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서 먼저 떠올린 것이 얼마 전에 읽었던 ‘이건희 컬렉션’에 대한 기사였다. 2021년 4월, 삼성가가 2만3000점에 달하는 이건회 개인소장의 고미술품과 국내외의 근현대 미술작품을 국가에 기증했다는 내용이다.

1960년대 중반까지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국립현대미술관’이나 당시 초라한 느낌만을 내게 남겼던 덕수궁 석조전의 ‘국립중앙박물관’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보니 이번 기증은 ‘세기의 기증’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번 기증 목록에는 들어 있지 않았지만, 그는 현대 추상화 가운데 작품 한 점에 보통 5000만달러 이상으로 거래되는 마크 로스코(1903~1970)의 작품도 소장하고 있었다. 상상을 초월한 고가의 작품들이 무슨 목적으로 어떻게 구매되었는지에 대한 의혹의 눈길이 따랐으며 삼성가의 비자금 관리와 탈세의 한 편법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사회적인 공분도 자아내기도 했다.

미술작품은 수집가의 관심과 취향도 중요하지만, 오늘날 글로벌 예술시장은 2700여명에 달하는 억만장자의 구매력에 의해서 많이 좌우된다. 러시아, 중국 그리고 아랍세계의 큰손들은 자산증식의 목적과 과시욕으로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내고 고가의 미술품을 경쟁적으로 사들인다. 한국을 두 번이나 방문했던 무하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2017년 크리스티 경매에 나온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세상의 구원자’를 무려 4억5000만달러에 사들였다. 역사상 가장 비싼 가격의 그림이었다. 이전 소장자는 러시아의 거부 드미트리 리볼로프레프였다.

‘이건희와 삼성’ 새 예술공간 기대

1979년 돈과 예술의 관계를 독일의 전위작가 요셉 보이스(1921~1986)는 서독의 10마르크 지폐 20장에 간단히 “자본=예술”이라고 쓰고 서명했다. 자신의 작품이 터무니없이 고가로 미술 시장에서 거래되는 현실에 불편한 심기를 표현했지만, 이 지폐 역시 고가로 거래되는 예술작품이 되었다.

전면에 우체국 소인이 찍힌 그레이엄 벨의 전화기 발명 100주년의 기념우표를 붙이고 자신이 서명한 2달러 지폐를 1976년에 작품으로 내놓았던 미국의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1928~1987)은 보이스와 달리 돈과 예술의 관계를 적극 평가했다. “돈벌이는 예술이다. 노동은 예술이다. 좋은 비즈니스는 최고의 예술이다”라고 그는 주장했다.

어떻든 돈과 예술은 동전의 앞뒤와 같은 관계이기에 예술작품의 가격은 동시에 이의 가치를 입증하게 되고, 파는 자와 사는 자는 시장에서 만나게 된다. 돈으로 도덕과 양심까지도 살 수 있는 세상에 예술작품을 사고파는 것이 문제가 될 리 없다. 10조 원에 육박한다는 환산가치를 지닌 작품들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결단이 비록 면피성이었을지라도 비난받을 일만은 아니었다.

조국이 없었던 ‘경계인’ 굴벤키안이 그의 말년을 보냈던 리스본에 공익사업 목적으로 자신의 소장품을 위한 사립박물관을 세웠지만, 이건희 컬렉션은 국가에 기증되었다. 따라서 국가의 문화행정이 이를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관리하는 문제가 먼저 제기된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안에서 문화영역이 지니는 공공성이 시장의 논리에 의해서 축소되거나 훼손되면서 문화와 예술의 개념도 모르는 사이에 변질하는 위험을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경고한 적이 있다. 이런 점에서 이건희 수집품을 국가나 공공기관이 관장하는 것이 바람직한 성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러나 변화와 창의성에 둔감하고 타성에 젖은 문화행정과 관료주의가 오히려 득보다 실을 가져올 위험은 더 크다. 단지 ‘이건희’와 ‘삼성’의 경제신화와 연동된, 이른바 명품 보존이 주목적이 되는 또 하나의 예술공간이 탄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구상에는 크고 작은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수도 없이 많다. 이 가운데 문화와 예술의 역동성을 느끼게 했던 곳이 과연 어디였던가를 종종 묻는다. 단순히 역사가 길고 전시 공간이 넓어 관람자가 많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문화와 예술체험의 성장과 확충을 통해 더 인간적인 세계를 함께 준비할 수 있는, 그러한 새로운 공간이 나름대로 기다려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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