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포옹하기 위하여

인아영 문학평론가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미래로 나아가길 원하는 사람과 과거로 돌아가길 바라는 사람. 미국의 여성 시인 루이즈 글릭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계속 움직이려는 사람들과/ (…)달리던 궤도에서/ 멈추어지길 원하는 사람들”(‘신실하고 고결한 밤’)로 나뉜다고. 왜 누군가는 앞을 향해 멀쩡히 나아가는 동안 다른 누군가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걸까? 단지 나이가 들기 때문일까? 글릭이 70대에 접어들면서 쓴 열두 번째 시집 <신실하고 고결한 밤>(정은귀 옮김, 시공사, 2014/2022)에는 그와는 다른 이야기를 한다. 그녀가 202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스웨덴 한림원이 찬사를 보낸 <아베르노>(2006)나 그녀에게 퓰리처상의 영광을 안긴 <야생 붓꽃>(1992)에 비해 확실히 덜 읽히는 시집일지는 모르나, 인생의 밤에 이른 시인의 원숙한 응답은 오로지 이 시집에만 있다.

인아영 문학평론가

인아영 문학평론가

루이즈 글릭은 10대 시절 거식증을 앓았다. 대학교에 진학한 이후로도 7년 동안 정신치료를 받고 이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정은 침대 위에 누워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의 몸으로부터 이탈하려는 열다섯 살 소녀를 그린 ‘굶기에 대한 헌신’이라는 시에 드러난다. 시인 자신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거식증은 어머니, 그리고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죽은 언니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하지만 글릭의 시에 이 부재하는 여성들은 끊임없이 출현해서 말을 건다. <신실하고 고결한 밤>에는 더욱 그렇다. 그토록 멀어지고 싶었던 어머니가 101세의 나이로 돌아가신 이후에 쓰인 시집이기 때문이다.

“밤중에 전화가 울렸다. 울리고 또 울렸다/ 마치 세계가 나를 필요로 하는 듯,/ 실제로는 정반대였는데”(‘밖에서 오는 사람들’) 침대에 누워 있는 ‘나’에게 전화벨이 울린다. 자꾸만 울리는 것을 보면 ‘나’를 애타게 필요로 하는 사람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왜인지 받을 때마다 전화는 거듭 끊어진다. 그러다가 겨우 들려오는 것은 죽은 어머니의 힐난하는 목소리. “네 책들이 천국에 도착해서 우리는 책을 읽었어./ 우리 이야기는 거의 없더구나, 언니 얘기도 거의 없고.// 우리가 아니면, 어머니가 말한다, 너는 있지도 않을 건데.” 긴 밤이 끝나길 기다리며 누워 있는 ‘나’는 그제야 깨닫는다. 평생 도망치고 싶었고 듣고 싶지 않았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사실은 자신이 가장 원하고 필요로 하는 목소리였음을.

이제 인생에 남은 일이라고는 끝을 기다리는 일밖에 없는 것처럼 보일 때 시인은 무엇을 할까?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만 가고, 주변 사람들은 하나둘씩 흩어지고, 사랑하고 미워했던 어머니도 세상을 떠났을 때 말이다. 그럴 때 루이즈 글릭과 같이 위대한 시인은 과거로 돌아가 미래로 이어지는 길을 낸다. 한밤중에 들려오는 죽은 어머니와 언니의 목소리를 통과하고, 영국 시골에서 부모 없이 형과 함께 이모네 집에서 사는 소년의 목소리를 빌리면서 말이다.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가 다시 돌아오고, 물속의 길을 부수면서 새로운 앞을 향해 나아가며, 돌고 돌도록 이어져 한참을 헤맨 후에야 간신히 제자리로 순환하는 밤길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노년에 이르러서야 “작별들이 세상 돌아가는 방식”임을 깨달은 여성 시인의 시적인 대답이다.

그러니 루이즈 글릭의 시를 읽고 난 우리는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고쳐 말해야 한다. 미래로 나아가길 원하는 사람, 과거로 돌아가길 바라는 사람, 그리고 끊임없이 과거로 가면서 미래를 만드는 사람. 이 세 번째 사람은 시를 쓴다. 신실하고 고결한 밤이라는 인생의 시간을 포옹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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