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쟁이 낳은 유배…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영원한 건 푸른 생명의 나무

김형진 셀수스협동조합원

(65) 조광조 ‘유허비’

1971년, 2023년 조광조 ‘유허비’. 셀수스협동조합 제공

1971년, 2023년 조광조 ‘유허비’. 셀수스협동조합 제공

유배는 죄인을 먼 곳으로 보내 격리수용하는 형벌로 ‘귀양’이라고도 했다. 조선시대 관직자 4명 중 1명은 유배형에 처해졌는데 주로 정치범들이었다. 사육신처럼 역모를 꾀한 자들은 사형됐지만 권력다툼에서 배척당한 이들은 유배됐다. 유배는 사형보다 한 단계 낮은 형벌이고 정해진 기간이 없는 무기징역형으로 형기는 왕 마음이었다.

사형을 가까스로 면한 자들의 유배지는 북쪽 변방의 함경도 삼수갑산, 남쪽으로는 외딴섬이었다. 평생을 일해보지 않은 벼슬아치들이 뱀, 벌레, 해충이 득실거리는 초가집에서 하루 세끼를 혼자 힘으로 해결하는 것만으로도 죽을 노릇이었다.

유배 전과자 비율이 왜 이렇게 높았을까? 양극화된 당쟁 때문이다. 요직은 훈구파가 차지했다.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웠다는 뜻의 훈구파는 이성계 때부터 대토지를 소유한 기득권자들인데 여기에 선비세력이라 불리는 사림파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사림파 대표주자는 조광조였다. 조광조는 훈구파의 땅을 몰수하고 자기 세력의 정계 진출을 위한 개혁을 급하게 추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실패의 결과는 참혹했다. 조광조는 유배되었다.

조광조의 유배 길에도 금부도사가 동행했다.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 땅에 조광조는 남겨졌고 금부도사는 한양으로 떠났다. 1개월 후, 금부도사가 이곳에 와서 외쳤다. “어명이오! 죄인 조광조는 사약(賜藥)을 받으라!” 금부도사가 갖고 온 사약의 ‘사’자는 죽을 사(死)가 아니라 하사할 사(賜)이다. 왕이 하사하는 약이다.

조광조 사후, 그를 기리는 비가 유배지에 세워졌다. 비의 받침돌은 거북이 모양이고 앞면에는 ‘정암 조선생 적려 유허추모비’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적려’란 ‘유배 갔던 곳’이고 ‘유허비’는 ‘한 인물의 자취를 밝혀 후세에 알리고자 세우는 비’를 말한다. 이 비문은 당대 최고의 세도가 송시열이 지었는데 그 역시 유배를 당하고 사약으로 생애를 마감했다.

지금은 힐링 관광지가 된 섬(제주도, 거제도, 진도, 흑산도 등)에 과거급제자들이 명단을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유배를 많이 갔다. ‘가문의 몰락’이 된 유배자들은 왕이 불러서 다시 한양으로 무사 귀환한 이도 있고 그러지 못한 채 죽은 이들도 있다. 그들이 머물던 유배지의 모래, 바다, 나무, 바람은 자연의 섭리에 몸을 맡기며 자기 모양새를 지켜내고 있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오직 영원한 것은 저 푸른 생명의 나무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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