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을 도둑이라 못하고

이중근 논설고문

미국이 용산의 대통령실을 도청했다는 뉴스가 나왔을 때 곧바로 오래전 한 장면을 떠올렸다. 1996년 군 장성 인사 직후로 기억한다. 김동진 국방장관이 기자들에게 이상한 일을 당했다고 말했다. “엊그제 미군 고위 장성을 만났는데, 나에게 한·미 군 현안에 대해 이런 말을 했느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은 자신이 며칠 전 한국군 고위 장성과 단둘이 장관실에서 나눈 대화 내용이라는 것이었다. 바로 “우리 둘이 나눈 대화를 어떻게 미군이 아느냐”고 했더니 그 장성은 자신은 그 누구에게도 발설한 적이 없노라고 했다는 것이다. 김 장관은 “그렇다면 미군이 내 방을 도청했다는 말인데…”라며 얼굴을 굳혔다. 그렇지 않아도 국방부 구청사 2층 끝에 있던 장관실은 미군 부대 쪽을 향하고 있어 안테나만 이쪽으로 돌리면 도청이 가능하다는 말이 있었다.

이중근 논설고문

이중근 논설고문

김 장관이 왜 이런 민감한 사안을 기자들에게 토설했을까? 설마 미군이 자신을 도청하겠느냐고 생각해 무심코 털어놓았던 게 아닐까. 아니면 확실한 증거는 없어 정식 항의는 못하지만 미군을 향해 경고의 의미로 기자들에게 말했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당시 군 고위 관계자 여럿이 미국의 도청 가능성을 언급했다. 다만, 증거가 없을 뿐이었다.

미국 정보기관이 국가안보실 관계자들의 대화를 엿들었다고 폭로된 지 열흘이 지났다. 이번 사건은 명확하다. 한국의 당국자들이 설마설마해온 미국의 도청이 사실로 확인된 것이다. 여러 정황을 종합해볼 때 이는 오래전부터 일상적으로 한국의 주요 기관에 대한 도청이 이뤄졌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의 대응이 상식을 벗어나고 있다. 사실 확인은 하지도 않은 채 처음부터 “미국이 도청했다는 증거가 없다”거나 “공개된 정보 상당수가 조작됐다”고 했다.

그러다 미국 주방위군 소속 공군 일병에 의해 폭로됐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악의에 의한 도청은 없었다”고 했다. 미국 관리들이 “큰 누를 범했다며 무척 미안해했다”는 말까지 전했다. 도둑질을 당하고도 도둑이라고 하기는커녕 그들을 이해하고 감싸기 바쁘다. 미국 관리들보다 더 미국을 걱정하는 듯하다. 바닥까지 자존감이 떨어진 한국민들은 윤석열 정부의 국정수행에 실망을 넘어 분노하고 있다.

2013년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미국에 의해 자신이 도청당했다고 하자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공식 항의했다. 그런데 한국은 정반대였다. 미국을 방문한 김태효 안보실 1차장은 “한·미가 이 건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신뢰 관계를 갖고 더 내실있게 정상회담을 만드는 데 의기투합했다”고 했다. 불법 도청을 한·미 정상회담 의제에 포함시키지 않는 것은 물론, 한·미 정보협력을 ‘파이브 아이즈(Five Eyes)’ 수준으로 강화한다고 했다. 대통령실의 비상식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우리와 함께 도청을 당했다는 다른 나라들은 아무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며 이를 비판하는 야당과 국내 언론을 비판했다. 국익을 위해 침묵하라는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가 우리를 도청했어도 과연 이렇게 대응할 것인지 묻고 싶다.

윤 대통령이 다음주 미국을 국빈방문한다. 미국은 윤 대통령을 극진하게 대접할 것이다. 북핵 대응을 위한 미국의 안전보장을 한층 더 강조할 것으로 예상된다.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반도체법에서 한국 기업에 대한 배려도 언급할 수 있다. 상·하원 합동 연설은 윤 대통령을 한껏 고무시킬 것이다. 하지만 도청에 대한 진사의 대가로 급조된 선물이 얼마나 내실이 있을까.

이번 도청은 근래 한·미관계에서 가장 심각한 사건이다. 윤 대통령은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 불법 도청에 대해 엄중히 항의하고 책임있는 조치를 요구해야 한다. 아무리 화려한 언어로 포장해도 미국의 분명한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이 없으면 이번 방미는 ‘굴종 외교’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 도청 사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에 대해 김태효 1차장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미국과 일본을 일방적으로 두둔하고 한·미·일 군사협력을 강화한다는 발상의 주체인 김 차장을 외교안보팀 사령탑에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그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한 비슷한 일은 계속 일어날 수밖에 없다. 70주년을 맞은 한·미 동맹은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해야 발전할 수 있다. 미국에 대해 할 말은 해야 한다. 윤 대통령이 방미와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한다면 그 후과는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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