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 갤러리에 무덤 사진만 500장이 넘는다. 경주에 다녀왔다는 증거다. 최고 기온이 30도를 넘는다는 예보가 나온 날 경주에 간 건 정말 좋은 선택이었다. 떠나기 전 친구는 내게 ‘많이 걷고, 적게 생각하라’고 조언했다. 침묵을 찾기 위해 경주에 머물렀던 영화 <경주>의 주인공처럼. 과연 경주는 많이 걷고 적게 생각하기 좋은 도시였다. 천년이 넘은 거대한 무덤 사이를 걷다 보면 산수화에나 나올 법한 고목들이 널찍한 벤치 위에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높은 건물이 없어 모두가 나른한 볕을 나눠 가질 수 있는 땅에서 누군가는 ‘인생샷’을 건지며 활짝 웃을 수 있었고, 누군가는 죽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있었다.
출발 전 명상을 도와준다는 ‘코시차임’이란 악기도 챙겼다. 저녁을 조금 일찍 먹고 보문호수에서 산책을 하고 밤이 되면 숙소에서 명상을 하는 것이 나의 계획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나는 ‘고요와 휴식’이라는 여행의 테마에 진심이었다. ‘많이 걷고 적게 생각’하는 계획이 실패할 리 있겠는가?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대릉원을 한 바퀴 돌고 나와서 주차장으로 걸어가기 직전까지는.
‘10원에 그려진 탑이 불국사 안에 있는 건가?’ ‘말 목 자른 사람이 누구였지?’ ‘에밀레종은 매일 치는 거였던가?’ 머릿속에 파편처럼 흩어진 지난 국사 시험의 암기 내용과 수학여행의 기억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발길이 닿는 걸음마다 유적과 보물이 있는 도시에서 어떻게 ‘많이 걷고 적게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마음을 다스리며 가까운 ‘첨성대’만 보자고 결심했다. 이정표대로 핸들을 꺾는데 갑자기 길에 사람들이 붐비기 시작했다. ‘무덤뷰’ 앞 에스프레소바와 크림치즈 황남빵 가게가 있는 그곳은 바로 ‘황리단길’이었다. 관광객의 활력을 느낀 순간 내 안의 ‘고요한 명상가’는 미처 날뛰기 시작했고, 여행 계획은 명승지와 맛집 중심으로 전면 수정되었다.
불국사를 걷는 내내 청하의 ‘Stay Tonight’을 들었다. ‘에밀레종’을 보러 가는 동안엔 현인이 부른 ‘신라의 달밤’과 조명섭이 부른 ‘신라의 달밤’을 비교하며 들었다. ‘선덕여왕릉’에선 “고현정이 선덕여왕인가?” 하는 다른 관광객의 말에 “아뇨. 선덕여왕은 이요원이에요”라고 말해주었다. 마지막 목적지는 중심지로부터 한참 떨어진 ‘무열왕릉’이었는데 급조된 여행 동선에 체력이 바닥났음에도 오직 바다를 본다는 설렘에 서핑 음악을 들으며 소리를 질렀다. 여행을 하면 할수록 내게서 명상은 멀어져만 가고 가방 속 ‘코시차임’만이 고요히 휴식을 취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자적 숲; 소진된 인간> 1부 ‘백남준과 함께 (전자) 명상하기’는 소음과 자극이 일상이 된 현대인들의 피로와, 그 피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모든 시도들을 주제로 한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작업은 ‘블루 부처’였다. 백남준의 92년작 ‘블루부처’에 여성 전자 음악가 살라만다, 씨피카, 아나 록산느 세 팀이 앰비언트 음악을 입힌 작업은, 복잡한 브라운관 속 화면과 난해하게 믹싱된 예불, 목탁 소리가 어우러져 기이한 집중력을 끌어낸다. 어두운 공간에서 네온색으로 발광하는 불상은 도시에서 휴식을 찾을 수 없다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공감하며 ‘소음으로 명상을 하는 방법’을 대안처럼 고요히 제시한다. 모든 소음으로부터 유리된 완벽한 명상을 꿈꾸는 이들에게, 소음과 자극 속에서도 ‘나를 지켜낼 의식’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역설이다.
여행과 전시를 모두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틈틈이 마음건강을 챙기는 것이 현대인의 명상이라고 생각한다. 집에 와서 스트레칭 유튜버의 ‘15분 명상’을 본다. 호흡 카운트까지 대신 해주니 이보다 고마울 수가 없다. 영상을 보다가 웃음이 난 건 ‘코시차임’도 사실 이분이 쓰는 게 좋아 보여서 구입한 것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