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대지진도 몰랐으면서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가스불 켜기 겁나는 염천에 오이지에 물만 부으면 한 끼 잘 넘길 수 있다. 사계절 내내 요긴한 오이지는 꼭 담가 먹고 살았건만 올해는 소금이 없어 포기했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 이야기가 나오자 소금을 쟁이면서 소금이 귀품이 되었다. 소금 품귀 현상에 대한 우려에 6월 초, 해양수산부에서 원전 오염수 이슈 때문이 아니라 비가 자주 내려 생산량이 줄어든 탓이라는 뜬금없는 해명이 나왔다. 마트와 염전 창고에 소금이 바닥나면서 개인 판매량까지 제한하던 때였는데 말이다. 별나라에서 사는 듯한 해명을 듣자니 국가가 보호해 줄 것 같지 않아 각자도생뿐이다 싶어 그나마 할 수 있는 소금이라도 사두자 했을 뿐이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2011년에도 소금 대란을 겪었다. 당시 동일본 대지진 여파로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나자 창문을 꼭꼭 닫고 소금부터 사들였다. 그때도 소금 사재기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전문가들이 한마디씩 보태며 비과학적 괴담 신봉자 아줌마들이 일으키는 소란 정도로 취급했다. 굼떠서 소금도 못 구했던 나는 내륙 출신으로 바닷가 생선을 즐기지 않으니 다른 이들보단 수월하게 살 수 있다며 ‘정신승리’로 12년간 살았다. 지금도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가 소금 대란을 위시한 수산업 피해로만 한정해 고관대작들이 횟집을 찾고, 급기야 물고기가 마시는 수조의 바닷물까지 사람이 떠 마시는 희대의 퍼포먼스까지!

어쩌면 이 문제를 물고기 잡고 김과 미역 기르고, 바닷가에 들어가 전복과 성게를 따는 해녀들의 문제로만 묶어버리고 싶은지도 모른다. 수산업계 일부는 아예 빨리 상황을 받아들이고 차라리 지원을 더 끌어내자는 목소리가 나온다. 수산업계 큰손인 수협중앙회는 오염수 해양 방류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방사능 검사를 더 꼼꼼히 하는 수산물 안전관리 체제로 방향타를 잡았다. 오염수를 방류하는 일본보다 더 빠르게 순응해버리는 모양새다.

하지만 내겐 생선이 아니라 오이지의 문제다. 바다와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배추 농가는 한창 배추가 비싼 철이건만 배추값 하락 소식을 듣고 있다. 소금이 없다면 배추를 절일 방법이 없어서다. 채소를 소금에 절여 장아찌로 밑반찬 삼는 일도 어렵다. 소금값이 채소값을 넘어 버렸기 때문이다. 콩에 소금 넣어 된장, 간장 없이 밥상 못 차리고, 간수 넣어 만든 두부로 된장찌개를 끓여 먹는 일을 인생의 행복으로 여기는 이들이 나 하나만은 아닐 텐데 콩 농가는 어쩔 것인가. 땅과 바다, 하늘의 연결 고리를 문과생인 나도 지구과학 시간에 배워서 알고 있다.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날 수 있다고, 세계의 연결성을 노래로도 배웠던 나는 ‘괴담 신봉자’가 되어버렸다.

지금의 사태가 과학적 사고를 하지 못하는 헛소동이라 하지만 1945년 8월, 아버지 어릴 때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이제 2023년 8월엔 원전 오염수가 흘러나올 차례인가. 내가 초등학생 때 텔레비전 뉴스로 체르노빌 원전 사고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딸아이가 체르노빌 때 내 나이가 되자 후쿠시마 원전이 녹아내렸고, 한 집안의 3대가 핵 문제를 목도한 셈이다. 정상적인 과학이라면, 과학설계의 총아인 원자력 발전소는 적어도 딸아이 세대에는 무너지지 말아야 했다. 그리고 이제는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의 안전성은 과학적으로 검증되었다며 ‘괴담’에 휩쓸려 소금, 미역 사재지 말고 생선이나 더 구워 먹으라 한다.

그러나 인간의 예측을 뛰어넘은 큰 지진은 어쩔 수 없던 ‘자연현상’으로 신의 영역으로 떠넘기는 태도야말로 비과학적 태도이지 않은가. 규모 9.0의 지진이 날 줄 꿈에도 생각 못했던 것이 12년 전 과학이다.

하물며 라파엘 글로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이 구순을 훨씬 넘긴 30년 뒤의 과학을 책임질 수 있는지, 과학 모르는 한국의 아줌마가 진지하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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