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상의 정상화’는 박근혜 정부의 대표적인 슬로건이었다. 잘못된 관행이나 제도를 철폐하고 비리, 부패를 근절하겠다는 선언 같은 것이었는데, 첫 시작은 학교 앞 불량식품 금지나 아파트 관리비 비리 근절 같은 소소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정상화시킬 비정상의 범주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더니, 국정교과서 도입과 노조 탄압 등을 거치며 어느덧 내 편, 네 편을 가르는 잣대로 전락해 버렸다. 뒤이어 ‘참 나쁜 사람’ ‘배신의 정치’라는 어록을 남긴 박근혜 대통령은 결국 둘도 없는 내 편인 비선실세와의 국정농단으로 정상화를 끝장내 버렸다.
잊고 지내던 ‘비정상의 정상화’가 문득 떠오른 것은 얼마 전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언론 인터뷰에서 꺼내든 “비효율의 효율화”를 접하면서였다. 윤석열 대통령이 연구·개발(R&D) 예산을 ‘카르텔’로 지목한 지 한 달여 만의 일로, 부랴부랴 예산을 재검토하는 상황을 수습하며 내놓은 표현이었다. 하지만 주무장관조차 “과학기술계를 카르텔이라 한 것이라기보다 R&D 지원이 그만큼 비효율적이었다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해명에 애를 먹고 있었다.
박근혜 정부에 정상화시켜야 할 비정상이 있었다면 문재인 정부에는 청산해야 할 적폐가 있었다. 적폐의 사전적 의미는 ‘누적된 폐단’인데, 지나고 보니 전 정부의 비정상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전 국민적 지지를 얻으며 칼을 휘둘렀지만, 휘두르던 기세를 못 이겼는지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다 여럿이 감옥에 가고, 또 여럿이 재판을 받고 있다. ‘우리 블랙리스트는 블랙리스트가 아니다’라는 식의 항변을 쏟아내고 있지만, 그런 항변은 전 정부에도, 전전 정부에도 있으니 곧이곧대로 들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비정상·적폐 자리 카르텔이 대체
더 나아가 “적폐·역사 청산으로 진보·보수 간 정치적 갈등의 정도가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수준으로 강해졌다. 그것이 중첩되면서 민주주의의 안정적 운영을 위협하게 됐다”(최장집 교수)는 평가도 있으니, 편가르기 논란에서 아주 자유롭다고 말하기도 어려워 보인다.
이번 정부에선 비정상과 적폐가 있던 자리를 카르텔이 대체하는 모습이다. 카르텔은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담합하거나 연합하는 기업들을 일컫는 경제용어가 그 출발점이다. 윤 대통령은 아마 ‘끼리끼리 해먹는 나쁜 놈들’ 정도를 이권 카르텔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나쁜 놈들을 찾아서 잘못을 바로잡는 일은 당연히 옳다. 철근이 빠진 아파트들이 발견되면 조사를 하고, 조사 결과 전관예우나 담합 문제가 발견되면 ‘못된 카르텔’이라고 지적하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요즘은 순서가 영 이상하다. 잘못됐다고 지목부터 해놓고 왜 그런지, 근거가 뭔지 누구도 시원하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대통령이 카르텔을 먼저 지목하면 그 이유를 대느라 아래위가 땀을 뻘뻘 흘리며 애를 쓰는 것처럼 보인다.
시민단체를 지목하면 정부에서 그 근거로 국고보조금이 줄줄 새고 있다는 자료를 들이밀고, 사교육 이권 카르텔 발언이 나오자마자 세무당국이 대형 입시학원 세무조사에 나섰다는 소식 같은 것들이 그렇다.
오비이락이라기엔 비슷한 일이 너무 많고, 대통령이 문제를 미리 알고 있었다기에는 거창한 카르텔 대비 지금까지 나온 결과가 너무 부실하다. 객관적인 조사와 근거보다는 대통령의 개인적 생각이나 신념이 카르텔 국면을 이끌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이 드는 배경이다.
다시 R&D 예산으로 돌아가보자. 불호령이 떨어지자 정부는 곧장 예산 재검토에 들어갔다. 그리고 며칠 전 올해 예산보다 무려 3조4500억원이나 삭감된 새 예산안이 나왔다. 기초연구와 정부 출연연구기관들부터 된서리를 맞았다. 성과 부진 사업들도 대거 정리한다고 한다. 정부는 그러면서 “이권 카르텔이 다시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설명을 슬그머니 다시 끼워넣었다. 그렇게 하루아침에 누군가는 다시 이권 카르텔이 되거나 이권 카르텔의 공모자가 됐다. 그런데 정확히 누가, 어째서 카르텔인지는 이번에도 아직 설명이 없다.
이번 카르텔에 걱정부터 앞선다
한때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다’가 명언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요즘은 ‘똑똑하건 아니건 신념을 가진 사람은 무섭다’가 더 맞는 말처럼 느껴진다.
여러 정부를 거치면서 자신의 신념을 위해 원칙과 정의를 허무는 일들을 너무 자주 봐서 그런 듯하다. 힘겹게 비정상과 적폐를 보냈는데, 앞을 보니 이번에는 카르텔이 또 남았다. 이번 카르텔은 얼마나 제멋대로일지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