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쟁만 있고 진정한 정치는 실종된 한국 사회에서 정치 행위는 오락이 되고, 예능이 된 것처럼 보인다. 어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다는 한국의 정치는 유권자의 표를 얻기 위해 온갖 기술을 다 사용한다. 정치인들은 때로는 이익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누아르를 연출하기도 하고, 때로는 진지한 논의 대신 비방과 풍자에 능한 카바레티스트가 된다. 우리나라에 정치를 풍자하는 카바레 예술가가 발전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이미 너무 많은 카바레 정치인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현실을 더 좋은 방향으로 바꾸는 일에 종사하는 정치인에게 현실의 부정적 현상이나 모순 따위를 비웃는 비판 행위는 필요하다. 문제는 이런 비판에서 자기 자신을 제외할 때 발생한다. 자신은 전적으로 옳다고 믿고 남의 결점을 비웃으면서 폭로하고 공격하다 보면, 결국에는 옳음과 그름의 문제는 사라지고,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욕설만 난무한다. 정치적 비판은 해학적이어야 하는데, 요즘의 정치적 공방은 파괴적이고 자기 파괴적이다.
해학(諧謔)의 한자가 말해주는 것처럼 현재는 사이가 멀어졌어도 다시 뜻이 잘 맞게 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던지는 정치적 농담만이 익살스럽고 멋이 있다. 우리 정치인들의 말에는 이러한 품위와 품격이 없다. 공격적인 선동만이 멋있다고 생각하는 정치인들은 이렇게 정치를 예능으로 만든다.
그런데 맨날 똑같은 얼굴이 판에 박힌 프로그램만 반복하는 예능은 재미가 없다. 요즘 예능도 재미없지만, 사실 정치는 훨씬 더 재미가 없어졌다. 그 원인을 찾다 보면, 둘 사이에 많은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나왔던 사람만 계속 나온다. 공감과 익살보다는 과장과 자극적인 소재에 집중한다. 사람의 관심을 돈벌이 또는 득표의 수단으로 사용한다. 관심을 끌기 위해 악의적인 말로 상대방을 도발한다. 뭐 하나 잘된다 싶으면 모두 따라 한다. 신선하지 않은 사람들이 국민의 관심을 끌기 위해 상대방이 주는 부정적인 감정에 집중하는 것을 ‘어그로(aggro)’를 끈다고 하는데, 분란과 전쟁을 위한 지속적 도발 행위가 재미있을 리 없다.
민주주의 파괴하는 카니발 정치
우리 정치인들은 상대를 도발해 적의를 갖게 하는 어그로로 국민의 관심을 끄는 데 중독된 것처럼 보인다. 새로운 정권이 출범했음에도 신선한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모든 정치가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두 사람에게 집중된다. 자기의 정치적 권력을 보존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필요한 ‘적대적 공생관계’에 있는 두 사람은 연일 상대를 악의적으로 도발한다. 이 대표는 무기한 단식을 시작하면서 “오늘부터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무능 폭력 정권을 향해 ‘국민 항쟁’을 시작하겠다”고 선포했다. 전쟁을 하면서 말을 골라 쓸 필요가 없어서일까? 사즉생의 각오로 민주주의 파괴를 막아내겠다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거칠고 선동적이다.
이 대표의 단식투쟁은 우리 정치가 이미 카니발화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카니발화’는 사육제 축제를 가리키는 독일어 단어 ‘Karneval’에서 유래한 용어로 풍자 또는 사회적 비판을 목적으로 터무니없는 과장의 형태로 기존의 관습을 뒤집는 과정을 의미한다. 화려한 의상, 활기찬 거리 파티 및 정교한 퍼레이드로 구성된 브라질 축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합리적이라고 여겨지는 것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풍자 문화이다. 물론 카니발의 묘미는 카니발 시즌과 축제가 끝난 후에는 정상으로 회복될 것이라는 믿음에서 통상적인 규칙과 관계를 잠시 중단하는 데 있다. 단식은 두말할 나위 없이 극단적 정치 행위이다. 자신의 생명을 수단으로 삼는 정치적 행위가 뉴노멀이 되면 정치 자체가 파괴되기 때문이다. 정권에 반대하고 저항할 수 있는 다른 합리적 수단이 존재하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정치 행위가 바로 단식이다.
과연 지금의 정권이 어떤 반대의 목소리도 허용하지 않는 전체주의 정권인가? 단식 외에는 정권에 저항할 수 있는 수단이 정말 없는 것인가? 민주당이 ‘의회 독재’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절대적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여소야대의 상황을 고려하면, 이 물음에 결코 긍정적으로 답할 수 없다. 진영으로 갈라진 우리 사회에서 그를 지지하는 사람은 여전히 단식도 지지하겠지만, 국민 항쟁의 대열에 참여할 사람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는 왜 지금 명분도 없는 단식투쟁을 시작한 것일까?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과장된 방식으로 국민의 관심을 끌려는 목적이 아니라면, 그는 자신의 건강과 한국 정치의 건강을 위해 단식을 중단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카니발 정치다. 방탕한 축제 후에 정상적인 삶으로 되돌아가기는커녕 과장된 일탈이 이어지는 카니발 정치는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한다. 정권이 잘못된 방향으로 벗어났다면 무엇이 문제인지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이 문제를 합리적으로 논의해야 한다. 토론과 타협의 가능성을 처음부터 배제하고 상대방을 적대시하고 자극한다면, 우리는 결코 민주적 정상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정권 교체는 과거 정권에 당했던 것을 그대로 되돌려주는 보복 정치의 도돌이표일 뿐이다.
관심을 끌기 위해 더 큰 자극을 추구하는 카니발 정치에서는 사실 정상과 비정상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과거 같으면 정치 생명이 끝났을 스캔들을 겪고서도 끈질기게 살아남는 정치인들을 보면, 정치인은 자신에게 불리한 것도 유리하게 만드는 ‘반전의 기술’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도널드 트럼프가 법정에 출석하면 그의 인기가 무너지고 정치적 생명이 끝날 것이라는 많은 사람의 추측과 달리 그는 여전히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에서 압도적인 차이로 선두를 달리고 있다. 그는 부정적 상황을 긍정적으로 반전시키는 포퓰리즘의 대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치는 재미없어진다
카니발 정치는 치명적인 스캔들조차 정치적 자본으로 만드는 반전의 권력 기술에 기반한다. 이들은 국민의 관심을 끄는 스캔들을 오히려 정치적 자산으로 삼아 더 많은 관심을 끌기 위해 더 자극적인 선동을 한다. 카니발 정치에서는 어느 것이든 반대 방향으로의 영구적인 반전이 일어날 수 있는 정치적 분위기가 조성된다. 진실은 가짜뉴스가 되고, 가짜뉴스는 진실이 된다. 가해자가 오히려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는 가해자가 된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서로를 비판하고 비방하는 정치적 수사는 이미 프로파간다가 되었다. 윤석열 정권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하는 ‘무능’ ‘무식’ ‘불통’이라는 민주당의 정치적 수사는 ‘무능’ ‘독선’ ‘불통’이라고 문재인 정권을 비판했던 보수 세력의 정치적 수사와 판에 박은 듯이 똑같다. 윤 대통령이 정치적 반대 집단을 ‘반국가세력’이라고 매도하고 배제하는 것은 전 정부의 ‘적폐 청산’ 논리를 그대로 따른다. 우리 사회에 정말 자유 대한민국을 흔들고 위협하며 국가 정체성을 부정하는 세력들이 많다면, 그 사례와 근거를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반국가세력’이란 용어는 오직 국민의 관심을 끌기 위한 사운드 바이트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국민이 이러한 반전의 권력 기술을 꿰뚫어 보지 않는 한 카니발 정치는 끝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반전 기술의 핵심은 어디에 있을까? 카니발 축제에서 들었을 수도 있는 정치적 농담이 이 물음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치고받는 싸움에 연루된 두 남자가 재판을 받고 있을 때, 폭력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묻는 판사에게 한 사람이 분개해 이렇게 말했다. “판사님, 그가 반격했을 때 모든 게 시작되었습니다!”
이 우스갯소리의 핵심은 현실을 거스르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반전이다. 내 아이 손이 친구 뺨에 맞았다는 어이없는 표현에서 잘 드러나듯이 과도한 자기중심주의가 반전의 기술을 가져온다. 내가 때린 것은 당신이 때린 것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이고, 당신이 하는 짓은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것이란다. 민주주의에 대한 공동의 합의가 없으니 지켜야 할 규칙도 없고, 품격도 없다.
반성과 성찰, 용서와 화해 없이 계속되는 자극은 우리의 감각을 무디게 만든다. 이렇게 정치는 재미없어진다. 어떻게 이 카니발 정치의 비극을 막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