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육군본부 국감 현장. 한 국회의원이 묻는다. “6·25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 공산주의 침입에 맞서 싸운 전당(육사)에 공산주의 참여 이력이 있는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놓는 것이 정당하냐?” 박정환 육군참모총장이 답한다. “정당하지 않다.” 다른 국회의원이 묻는다. “육군총장이 헌법 정신을 부정하고 독립영웅을 부정하며, 일제에 항거한 역사를 지우는 것이 옳은가?” 박 총장이 다시 답한다. “육사의 설립 취지와 목적은 광복운동, 항일운동 학교가 아니다.” 육사 홈페이지에 실려 있는 육사의 목적. “국가방위에 헌신할 수 있는 육군의 정예장교 육성.” 교육의 제일 목표는 “자유민주주의 정신에 기초한 국가관 확립”이다. <학교역사>를 살펴봤다. 1946년 5월1일 국방경비대 사관학교 개교. 같은 해 6월15일 조선경비대 사관학교로 개칭. 1948년 9월5일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로 개칭. 육사의 ‘정신적 뿌리’를 물었더니 뜬금없이 ‘제도의 뿌리’로 답한 국방부 대변인의 말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5·16 군사 쿠데타 세력이 제일로 내세운 공약이다. 자유민주주의 정신을 반공으로 쪼그라트렸다. 그 이후 60년이 더 넘어 대한민국이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지만, 국가주의자는 여전히 자유민주주의 정신을 반공으로 축소하고 이를 제도화한 국가를 절대주권으로 떠받든다. 대한민국은 1948년 세워진 신생국가이며, 한반도라는 명확하게 구획된 영토 안에서 합법적 폭력을 독점한 관료제도다. 하지만 현실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또 다른 국가가 있다. 국가주의자는 대한민국의 존재 이유를 절대주권에 도전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말살하는 것에서 찾는다.
국가주의자는 현실주의자다. 언제나 합법적 폭력을 독점한 당대 국가를 맹종한다. 현실주의 국가관을 처음 명확하게 드러낸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트라시마코스. 비열한 동기와 사적 이해관계가 모든 정치를 지배한다는 현실론을 펼친다.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며, 강자에게 유익한 것으로 귀결된다.” 현실주의자에게 국가는 최고의 강자다. 합법적 폭력을 독점한 국가가 사적 보복의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가져온다. 이 평화는 너와 나를 묶어줄 수 있는 연대의 토대가 된다. 국가의 절대주권이 언제든 괴물로 돌변할 수 있다는 걸 아는 제도 민주주의자는 어떻게든 국가 권력을 쪼개려 한다. 민주주의가 3권분립과 같은 형식 제도로 축소된다. 공수처와 같은 국가 제도를 만들면 괴물로 변해가는 검찰을 민주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
국가주의자이든 제도 민주주의자이든 국가를 제도의 차원에서 바라보는 현실주의자라는 점은 똑같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수립을 독립운동의 결과가 아니라 미국의 2차대전 승리가 가져온 부산물로 여긴다. 독립운동은 현실적으로는 대한민국 수립에 아무런 역할을 못했다고 주장한다. “해방은 도둑같이 뜻밖에 왔다.” 성서로 장기간의 조선 역사를 해석한 이상주의자 함석헌마저도 이렇게 말하니, 현실주의자의 인식은 말할 것도 없다. 그중 국가주의자는 가치의 차원에서 너무나 빈곤하다. 가치가 초월의 힘을 가졌다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연대는 사람들이 ‘지금 여기’뿐만 아니라 ‘초월’을 지향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예수는 로마가 지배하는 당대 현실에서 단 한 명의 유대인도 제도적으로 해방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누구도 예수를 탓하지 않는다. 오히려 유대인이라는 좁은 테두리를 넘어온 인류를 구원하려는 예수의 초월적 가치에 공감한다. 독립운동가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 수립에 현실적 힘을 발휘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자유민주주의, 즉 ‘자율적 시민이 만든 보편적 연대’를 초월적 가치로 남겨주었다. 이를 현실 제도로 실현하는 것은 오롯이 우리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