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엔 ‘무해하다’라는 말이 찬사로 쓰인다. 갈등과 대립이 넘쳐나는 사회에 피로감을 느낀 탓일까.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무해함이 최고의 덕목으로 여겨진다. 서사 장르도 예외는 아니다. 무해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잔잔하고 평온한 이야기들이 유행한다. 하지만 무해한 서사가 각광받는 이 흐름이 달갑지만은 않다. 약자에 대한 폭력을 최소한의 고민도 없이 작품에 그대로 담아내던 ‘비윤리적인 재현 방식’에 대한 비판이 있었고, 그 반향으로 이러한 경향성이 생겨났음을 이해하고 긍정한다. 그러나 무해함을 요구하는 독자 및 시청자에 맞춰 고통당하는 이들의 비명을 말끔히 도려낸 고요한 진공 공간만을 전시하는 작품들이 쏟아진다는 점은 문제다. 누구도 해치지 않지만, 반대로 해를 입을 일 또한 없는, 타인의 고통을 몰라도 되는 위치에 있는 ‘선인(善人)’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이야기가 무해 서사로 상찬받을 때면, 탄식하게 된다.
최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는 무해함만을 맹목적으로 좇지 않는다. 정신병이라는 소재를 자극적으로 소비하지 않으며 의료인과 환자라는 이분법적인 위계 구분을 흐트러뜨린다. 강박장애가 있는 항문외과 의사 ‘동고윤’은 정신과 치료를 받고, 정신과 간호사 ‘정다은’은 우울증이 생겨 입원한다. 나아가 정신질환을 다루는 전문가나 정신질환을 앓는 당사자도 정신병에 차별적 시선을 지니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까지 낱낱이 드러낸다.
정신 병동에 입원한 환자들을 극진히 보살피며 이들을 결코 낮잡아 보지 않는, 다정하고 친절한 간호사 ‘다은’은 유독 유대감이 깊었던 환자가 죽자 우울증에 걸려 보호 병동에 입원하게 된다. 그는 병원에서 주는 약을 모아 몰래 변기에 버리며, ‘약을 먹으면 내가 정신병 환자라는 걸 인정하는 거니까’라고 혼잣말을 한다. 더불어 자신이 다른 환자들과 똑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는 데 분개하며 자신을 입원시킨 엄마에게 “내가 왜 그런 일을 당해야 돼?”라고 따져 묻는다. 주치의에게 퇴원시켜 달라 청하며 “전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하곤 다르잖아요”라고 호소하기도 한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는 역설적인 말처럼, 편견 없이 환자들을 사랑으로 보살피던 다은 역시 정신병 환자들을 나와는 다른 ‘그들’로 구분하고 있었으며, 이들과 같은 처지에 놓인다는 것은 다소 굴욕적인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셈이다. 수전 손택이 책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지적했던, 질병을 은유적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정신력이 약한 사람들이 걸리는 병’이라는 식의 왜곡과 숨겨야 하는 치부라는 낙인에서 벗어나 질병을 질병 자체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서 있는 경계인들이다”라는 드라마 속 대사는 울림을 주는 말로 호평받았지만, 정신병을 앓는 이들을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기존 관점을 답습하는 듯 보여 아쉽다. 그러나 누구라도 힘든 일을 겪게 되면 정신병에 걸릴 수 있으며 누구든 정신병에 편견을 지니고 있을 수 있다는 드라마의 메시지만큼은 높이 평가하고 싶다.
편견이란 우리 몸 깊은 곳에 뿌리내리고 어둠 속에서만 살아가기 때문에 스스로 밝힌 소박한 내면의 촛불로는 결코 찾아낼 수 없다. 외부의 무엇과 부딪쳐 깨어질 때 비로소 번뜩이며 제 모습을 드러낸다. 드라마는 우리 모두의 캄캄한 내부에 자리한 ‘정신병에 대한 끔찍한 편견’에도 눈부신 아침볕이 들게 한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는 의미의 소극적인 무해함보다 나의 유해함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개선해 나가는 적극적인 무해함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무해하기만 한 서사보다는 무해함의 허상에서 벗어나 다종다양한 해로움을 조명하되, 그것에 잠식되지 않고 덜 해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독려하는 서사가 더욱 많아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