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과 차이

류동민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

어느 예능프로그램에서 본 에피소드이다. 유명한 개그맨이 그 옛날에는 그녀 자신보다 훨씬 더 유명했던 이른바 국민가수급 원로의 모창을 했는데 막상 젊은 청중들은 그 가수가 누군지 몰라 일단 검색부터 한 다음, 검색화면과 모창을 비교한 다음에야 비로소 똑같다며 웃더라는 것이다.

사실 늘 젊은 학생들과 강의실에서 만나는 직업 특성상 비슷한 경험을 적지 않게 하곤 한다. 이를테면 한국경제론을 강의하며 당연히 알 거라 전제했던 재벌기업 창업주의 이름을 막상 학생들은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 그들이 아는 해당 재벌의 회장은 내가 말하는 분의 아들, 심지어는 손자라는 등의 경험이다. 그러하므로 산업화나 민주화의 경험과 교훈을 자랑스럽게 내세우거나 비난하며 폄하하는 것 모두 젊은 세대에게는 그저 현실과는 동떨어진 철 지난 이야기의 되풀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리라. 그럼에도 우리는, 아마 그 젊은 세대들마저도 언젠가는 자신의 개인적·사회적 경험이 반복되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되고, 그 느낌으로부터 끊임없이 유사성을 찾아내려 시도할 것이다.

어느새 1000만 관객을 넘겼다는 영화 <서울의 봄>을 아직 보지 못했다. 어쩌면 앞으로도 보지 못할 듯하다. 벌써 40년도 더 지난 군사쿠데타 당시 나는 엉터리나마 나름의 체계적인 세계관으로 상황을 기억할 수 없는 어린 나이였다. 그렇지만 바로 뒤에 이어졌던 ‘서울의 봄’, 마침내 ‘광주’를 거쳐 사복 경찰로 가득 찬 대학 캠퍼스, 인정사정없이 터지던 최루탄과 화염병, 그리고 이른바 민주화의 끝에 다시 쿠데타의 주역이 대통령에 선출되던 허망한 결말에 이르기까지 마치 배경화면이나 OST처럼 내 청춘에 깔려있던 시대의 우울을 굳이 후벼파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개그맨의 에피소드에서처럼 원본을 알지 못할 때, 우리는 모사본(검색화면)과 또 다른 모사본(모창)의 비교를 통해 판단을 내린다. 이를 그저 몇십 년에 걸친 시간 간격의 차이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끊임없이 이것이 원본이라고 주장하는 모사본을 만들어냄으로써 물질적 이익을 얻는 세력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세상은 스스로의 이익을 지켜내기 위한 수많은 모사본들 간의 투쟁인 셈이다. 그럼에도 그 세력들의 배치마저도 유사하게 되풀이되는 것은 그 반복 속에 관철되는 구조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구조가 불변의 것이라면 반복은 사실 무의미하다. 그 옛날을 야욕에 찬 독재자의 탄생으로 기억하는 이들이나, ‘구국의 결단’으로 기억하는 이들이나 가릴 것 없이 결과는 바뀌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40여년 전의 누군가에 오늘의 누군가를 일대일로 대응시켜보는 놀이만이 남을 따름이다.

그러나 반복 속에서도 차이가 존재하고, 비록 그 차이가 당장에는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로 미세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차이의 흐름이 역사를 바꿔나가는 것이라면, 우리는 단순한 ‘라떼 이야기’에서 벗어나 차이 속에서도 반복되는 구조, 그 구조하에서도 생겨나는 차이를 되새겨보려 노력해야 한다. 누군가의 권력욕과 결합한 합법적 폭력 혹은 폭력적 국가장치가 전면에 나서면서 세상을 움직이고 겉으로는 정의사회 구현이나 공정성 같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 포장되는 구조를 정면으로 응시해야 한다. 영화 속 인물 전두광을 현실의 그 누구와 연결짓는 것도, 우리는 사실 전두광과는 다르다며 현장부재증명을 제시하려 애쓰는 것도 결국 반복되는 구조는 물론 반복 속의 차이도 보지 못하게 만드는 태도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소설가 로맹 가리는 어디에선가 말했다. “모든 새로운 세대가 앞선 세대를 필요로 하지 않고, 앞선 세대들을 믿지 않고, 그들의 가치를 믿지 않고, 자기들 스스로 그 세대를 다시 발견한다는 일종의 법칙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덧붙이자면, 새로운 세대가 발견해내는 앞선 세대는 바로 앞선 세대들 스스로 원본이라 생각하는 모사본과는 다른 또 하나의 모사본이다. 그 모사본이 앞선 세대들의 성에 차지 않더라도 새로운 세대가 반복되는 사회적 문제를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깨닫고 해결해나가리라 믿는 것, 그것이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얻어야 할 행동지침일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한반도 남쪽에서의 지난 반세기가량의 역사만 보더라도, 만약 역사의 법칙 비슷한 무엇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주어지는 자유의 영역이 확대되며 그에 비례하여 권력에 대한 견제가 확장되는 것이다.

바야흐로 다시금 이러한 역사의 법칙에 대한 이성적 비관과 의지적 낙관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류동민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

류동민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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