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컨대 대학시절 최장집 교수를 싫어했다. 민주화에 대한 ‘제한적’ 의미가 불만이었다. 그에게 민주화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라는 기존 질서를 유지·온존하며 그 틀을 강화하고 내실을 다지는 것에 국한되어 있었다. 다른 종류의 민주주의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자체의 전화라는 상상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더욱이 민주화 이후의 운동의 존속을 정당제도의 미성숙이나 실패에 따른 결과 정도로 치부하거나 운동의 주체를 ‘엘리트 중산층’에 한정하는 그의 입장은 동의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정치와 운동을 보며, 특히 정치적 극단화가 심각하게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가운데 그를 너무도 쉽게 외면했던 것이 후회되었다.
최장집 교수가 2011년 여름부터 약 3년간 경향신문에 연재했던 칼럼을 다시 읽었다. 장위동 봉제공장에서 시작하는 그의 칼럼은 대표되지 못한 존재들을 훑고 정치와 정당의 역할을 짚는다. 10여년 전 글이지만 정당의 역할과 대표-책임의 연계, 의제설정의 변화, 시민사회의 성숙, 정치행태 등의 쟁점은 대표의 위기, 정당의 위기, 운동의 위기라는 당면한 현실에 비춰보았을 때, 당혹스러울 만큼 현재적이다. 결국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의 중핵에는 ‘대표’라는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정당체제의 근본적 변화 또한, 기존의 정치가 국민을 제대로 대표하지 못했다는 데 근거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민주화도 간단히는 민의가 온전히 대표되도록 만들어놓은 제도가 잘 작동하게끔 만드는 것과 닿아 있다. 최근 수년간 화두가 된 포퓰리즘이나 ‘민주주의의 위기’도 정당과 운동의 ‘대표 실패’의 틈새에서 발호한다. 사회운동도 정치로부터 탈락한 존재, 대표되지 못한 존재에게 목소리와 힘을 쥐여주거나 대행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리하여 정치 바깥에 놓인 이들의 권리나 요구가 정치적으로 표현되도록 한다.
우리가 현시점의 정부와 기성정당들에 대해 문제삼는 지점 또한, 대체로 대표의 문제다. 그들이 우리 사회의 갈등과 요구를 제대로 대표하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배제된 이들의 스피커가 되어주고 있는가? 이에 대해 진보운동은 그렇지 않다며 총선에서 정부여당을 심판하겠노라 말한다. 그렇다면 총선에서 그들을 기각하는 만큼 우리가 꺼내들어야 할 의제나 대표할 이들은 누구일까? 시민, 민중, 민생, 노동, 생태 등이 따라붙지만 모호하고 희미한 반면, 정부심판, (민주)진보연합, 진보정치의 단결 등의 주장은 강하고 선명하다. 최장집 교수는 한 칼럼에서 “(2012년) 총선의 가장 큰 특징은, 민주 대 반민주의 대립 축을 불러들여 야권연합을 성사시켰지만 기대했던 승리는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소외세력의 소리는 대표되지 못했고 노동 문제 역시 주요 이슈에서 배제됐다는 점일 것”이라고 적었다. 이번 총선은 다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