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근 칼럼니스트

좋은 소식이 있다. 첫째, 22대 총선이 양당 경쟁에서 벗어나 다당 경쟁으로 치러지고 있다. 제3지대 정당의 폭발 덕이다. 둘째, 선거 정보가 풍부하다. 온·오프라인 미디어는 누가 문제행동을 하고 이상한 말을 했는지 하나도 놓치는 법이 없다. 전국·지역 상황, 정당 지도부의 일거수일투족이 실시간 공유된다.

셋째, 대립 구도가 분명하고 단순하다. 다당 경쟁에 정보홍수라고 해도 누구를 선택할지 걱정할 게 없다. 정권심판, 이·조(이재명·조국)심판 가운데 고르면 된다. 그게 싫다면, 양당 동시 심판도 있다. 넷째, 진보정치가 확산됐다. 진보세력이 민주당 비례위성정당에 참여하고, 진보를 자처한 조국혁신당이 부상했다.

다당 경쟁, 풍부한 정보, 분명한 대립 구도, 진보 확산은 시민 선택지를 넓혀주면서도 선택을 수월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성숙한 민주주의 증거가 될 수 있다. 나쁜 소식은 한국적 현실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다. 다당 경쟁은 양당질서의 한 현상이다. 양당질서를 흔든 것처럼 보이는 탈당, 분당, 신당 창당은 사실 양당체제가 생존하는 방식이다. 양당체제는 내부 긴장이 커지면 일부 세력을 배출해 내부 안정화를 꾀한 뒤 이들을 다시 흡수해 양당 중력장에 가두는 복원력, 자기 재생 능력을 갖고 있다. 양당은 혁신이니 통합이니 하며 당명 바꾸고 공천 물갈이해서 거듭났다며 불만스러운 지지자들을 헷갈리게 하는 데 선수다.

정보의 풍부함도 정보 부족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투표 날이 코앞이지만 어느 정당이 어떤 비전·정책을 가졌는지 여전히 알 수 없다. 막걸리·고무신 선거 때와 같은 선심 공약을 정책이라고 할 수는 없다.

가장 많은 정보량을 차지하는 것은 지지율 여론조사다. 춤추는 숫자에는 나의 정책 선호와 가치를 반영하는 정보가 전혀 없다. 지지율로는 국을 끓여 먹을 수 없다.

선거 구도는, 어떤 희망도 없는, 분노 대 분노, 공포 대 공포뿐이다. 지지율 상위 세 정당 대표가 한 말을 모아보면 그 실상을 알 수 있다. 지금 감옥에 가야 할 범죄자가, 일베와 나베가, 쓰레기와 깡패들이 회칼로 찌르고 죽이며 정치를 개같이 하고 있다.

양당질서의 공고함, 정보 부족, 분노의 선거 구도는 하나의 나쁜 소식으로 수렴한다. 진보 위기다. 진보 확산은 진보 위기의 한 증상이다. 진보 확산은 진보정치 역량이 증대한 결과가 아니라, 진보가 산산이 부서지면서 나타난 착시 현상이기 때문이다. 진보정당은 다당제, 정치개혁이란 산소 공급 없이 숨 쉴 수 없다. 그럼에도 일부 진보인사는 위성정당 참여로 양당체제·정치개혁 후퇴에 기여해 진보가 숨 쉴 공간을 축소했다.

기후·불평등 문제를 자기 비전·정책으로 승부하는 것이 진보의 본령이고 경쟁력이다. 정책 쟁점은 없이 분노와 공포가 지배하는 선거에 진보정당이 설 자리는 없다. 녹색정의당의 위기는 한국 정치가 나빠진 원인이자 결과다. 그런 의미에서 녹색정의당은 한국 정치의 건강성을 점검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다. 녹색정의당 문제는 특정 정당과 이념을 지지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가 삶의 개선이라는 본래 역할에 충실하게 복무토록 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진보가 굳이 정당으로만 존재해야 하느냐, 어느 정당 의원이든 진보적이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할 수 있다. 정치, 특히 진보정치는 개인전이 아니라, 단체전이다. 정치는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상(像), 즉 이념·비전, 그것에 기초한 정책, 정책을 구현할 자율적 조직, 정책을 실천할 인물을 갖춰야 한다. 한국의 쏠림 정치에서 그것들이 개별로 존재해서는 힘을 쓸 수 없다. 하나로 통합된 정당으로 우뚝 서 있어야 한다. 개인이 진보적 신념을 지닌다는 것과 정당이 그런 신념의 실현을 당의 최고 목표로 추구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개인은 흔들리는 갈대이며, 불안한 존재다.

이벤트 정당이 아닌, 지속성 있는 독립된 정당만이 양당제 소용돌이에 빨려 가지 않고 자기중심을 지키며 기성 정당을 견제하고, 가치 있는 의제를 던질 수 있다. 그런 정당만이 낡은 정치에 자극과 긴장감을 주며 양당질서에 균열을 낼 수 있다. 녹색정의당의 위기가 자기 실수에 대한 대가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양당에 다시 기회를 준 것처럼 녹색정의당에도 기회를 주는 것이 공정하다.

기득권 정치를 당장 깨지 못한다 해도 단단하게 조직된 하나의 의견, 무시할 수 없는 이견의 제시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이대근 칼럼니스트

이대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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