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폐허를 응시하자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숫자만 남았다. 거슬러가면 ‘응급실 뺑뺑이’ ‘소아과 오픈런’ 등으로 드러난 필수의료·지역의료 위기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가 사회적 관심사였다. 언젠가부터 의사 수가 얼마나 부족한지, 어떻게 늘릴 것인지로 관심이 옮겨가다가 이제는 내년도 의대 입학 정원이 몇명일지만 남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풀기 쉬운 문제는 아니었다. 의사가 부족하다는 근거로 곧잘 인용되는 OECD 비교를 보면 한국은 괴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객관적 건강 지표는 우수한데 주관적 건강 인식이 매우 낮다. 의사는 적은 편인데 병원과 병상과 장비는 매우 많다. 1인당 외래 진료 횟수나 입원일수는 평균의 두 배를 넘는다. 한국 사람들이 두 배나 더 아플 리 없는데 말이다. 동시에 제때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심각한 불균형이다.

시작부터 자유방임형 의료체계, 체계 없는 체계였기 때문이다. 국가는 예산을 집행해 체계적으로 의료서비스를 공급하는 대신, 민간의료기관이 돈 벌 시장을 만드는 데 집중하고, 의료기관을 어디에 어떻게 개설하고 운영할지 거의 민간에 맡겨왔다. 국가 주도의 체계적인 건강보험조차 방임에 기여했다. 의료 이용의 경제적 부담이 줄어든 조건이 자본엔 수익을 올릴 기회가 된 거다. 민간병원이 더 늘었고 재벌병원도 등장했다. 큰 병원은 안 와도 되는 사람들까지 오게 만들면서 돈을 쓸어갔고 작은 병원들은 비급여 진료를 늘려 수입을 올렸다. 민간보험사가 뛰어들어 실손보험을 쏟아내며 시장을 키웠다. 국민은 과잉 진료를 받고 의사는 과로하고 의료비는 증가한다. 긴 대기시간, 짧은 진료시간도 이런 구조의 결과다. 한국 의료의 문제는 부족보다 과잉이다.

지역과 필수과목의 의사 부족도 과잉의 이면이다. 돈 되는 지역과 과목으로 자본도 사람도 흘러가는 구조에서 의사 수만 덜렁 늘려 불균형이 해소될 리 없다. 지역의료가 무너지는 건 지역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며 필수의료가 무너진 건 공공의료가 사라져온 탓이다. 의사를 기업가로 만드는 구조에서, 출생률이 뚝뚝 떨어지는 걸 빤히 보며 소아과 의사가 되겠다거나, ‘지방소멸’ 추세가 번연한데 지방 의사로 살겠다면, 기업가로선 실격이다. 수가 인상 같은 임기응변 대처가 실패해온 이유다.

윤석열 정부는 문제를 푸는 대신 숫자 폭탄을 던졌다. 작년 가을까지도 500명 예측이 떠돌다가 불현듯 2000명이 됐는데, 까닭을 알 수 없다. 당장 두 배 되는 입학생들을 어떻게 교육할지, 이들이 졸업할 때면 무엇을 하게 되는지 계획도 없다. 터무니없는 숫자를 맞추느라 수요 조사로 우회했고, 등록금 수입과 지원에 솔깃한 대학들이 앞다투어 써낸 정원이 유일한 근거로 남았다. 윤석열의, 윤석열에 의한, 윤석열을 위한 2000이었다.

전공의들은 사직 폭탄을 던졌다. 의사집단은 의대 증원에 실린 국민의 기대를 찬찬히 헤아리는 대신 정부와 싸우기 바빴다. 강 대 강 대치 국면에서 한국 의료의 위기를 함께 풀어갈 자리는 사라져버렸다. 시장의 원리를 관철하려는 정부 대 시장에서의 권력을 지키려는 의사집단 간 힘겨루기 끝에 정원이 얼마로 정해지든 결과는 다르지 않다. 시장이 이기고 폐허가 남는다.

우리가 바라는 사회의 모습은 소박하다. 누구든 어디에 살든 얼마를 벌건, 아플 때 어렵지 않게 의사를 만나, 필요한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사회. 동네에 내 말에 귀 기울이는 의사 한 명이 있어 건강하게 살아갈 힘을 주는 체계. 꼬일 대로 꼬인 한국의 의료체계로부터 공공의 길을 내기란 만만치 않다. 크게 바꾸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상황인데 한 번에 바꿀 뾰족한 수도 아직 없다. 정치권과 의사집단만 쳐다보고 있을 수 없다. 평범한 우리가 더 많이 이야기하며 대안을 만들기 시작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선, 이 폐허를 응시하자.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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