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n or Nothing’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안호기 사회경제연구원장

미국 뉴욕주 북부의 작은 도시 워터타운은 정치적으로 가장 관대한 곳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워터타운이 속한 제퍼슨 카운티는 보수 성향이 강한 지역이지만 정치적 관용에서는 최상위 1%에 속한다. 정치적 성향이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면 화가 날지, 상대방을 묘사할 때 어떤 단어를 사용하는지 등을 조사했더니, 이곳 시민들이 매우 관대하다는 결과를 얻은 것이다.

워터타운 인구는 2만9000명가량인데, 불교 사찰 2개와 이슬람 사원 1개 등 종교시설이 23개에 이른다. 시민들이 서로를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사회적 거리가 가깝다. 상대를 배척하지 않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도 갖췄다. 목사인 프레드 게리는 정치적 성향이 각각인 성인 10여명과 일주일에 한 번씩 책과 삶, 정치에 대해 토론하는 모임을 운영한다. 모임이 성공적으로 이어지는 비결에 대해 게리는 ‘직접 만난다’ ‘집에서 만든 좋은 음식을 나눈다’ ‘함께 시간을 보낸다’ 등 세 가지 요인을 꼽았다.

이곳에 최근 퇴행 조짐이 드러나고 있다. 일부 사람들이 공공장소에서 정치에 대한 언급을 피하기 시작한 것이다. 워터타운 사례를 <분열의 시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서 소개한 피터 콜먼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비규범적인 소셜미디어의 비하, 케이블 뉴스의 독설과 야유, 공개적으로 경멸하는 정치 엘리트들의 모습이 피해를 유발하기 시작했다”고 진단했다.

한국의 양상과 매우 비슷하다. 정치인들은 상대에 대한 도를 넘는 비난과 험담을 내놓는데 근거는 미약하다. 극우 또는 극좌를 지향하는 일부 소셜미디어와 케이블방송은 작은 의혹을 부풀리기 일쑤다. 이들은 내 편 아니면 모두를 적으로 낙인찍고 분열을 가속화한다. 한국 사회는 이념과 정치적으로 두 집단으로 나뉜 채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중간지대가 없는 데다, 양극화를 유발하는 세력들에게 갈등을 해소할 방안이나 의지가 없다는 점이다. 권위주의를 강화한 정권은 일방통행식 불통 정책을 밀어붙인다.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은 소송과 압수수색, 표적 심의 등으로 겁박한다.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29일 만났다. 윤 대통령 취임 후 720일 만에 처음 야당 지도자와 회담이 성사됐다. 회담 다음날 아침 신문 제목은 ‘~성과 없이 끝났다’(경향신문), ‘서로 하고 싶은 말만 한 130분’(중앙일보), ‘~빈손으로 끝났다’(한겨레) 등 부정적 평가가 더 많았다. 회담 후 양측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박성준 민주당 수석대변인) 등 발언을 내놨다. 합의는 없었어도 그동안 퇴행을 거듭하던 민주주의를 회복할 기미라도 보인 셈이다.

“민주주의는 의견 불일치를 해결하기 위한 시스템”이라고 정의한 벤 엔셀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는 <정치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민주주의 시스템에서 시민들은 서로 다른 의견을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표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썼다. 상대를 도망칠 수 없는 구석으로 몰아세울 게 아니라 여지를 남겨야 한다. 그래야 협의를 이어가 합의에 이를 수 있다.

야구 예능 <최강야구>의 슬로건 ‘Win or Nothing(승리 아니면 아무것도 없다)’은 민주적이지 않다. 선거에서 이겨 전권을 휘두르는 시스템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선거 승자는 패자를 배제해서는 안 된다. 얀 베르너 뮐러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는 <민주주의 공부>에서 “패자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말은 아마 ‘패자도 여전히 자기주장을 펼칠 자유가 있고, 배제되거나 구조적인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는 말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권위주의적 포퓰리스트의 통치하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단서를 달기는 했다.

2022년 대선에서 승리했던 윤 대통령은 ‘자기주장을 펼 패자의 자유’를 무시한 채 오만했다. 올해 민주당을 이끌고 총선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둔 이 대표도 기세등등하게 정부와 여당을 압박한다. 분열 조짐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워터타운의 많은 시민들은 토론과 교류를 통해 지역사회 회복을 꾀하고 있다고 한다.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과 만나는 건 불편한 일이다. 하지만 거기에 익숙해지면 이슈에 관한 이해가 높아지고, 상대방에게 개방적이고 수용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포퓰리즘과 선동, 극단주의에 찌든 한국 정치인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것은 워터타운 시민들의 ‘관용’이다.

안호기 사회경제연구원장

안호기 사회경제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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