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개와 마지막 정류장

김숨 소설가

나는 멀리서 왔다. 누구나 멀리서 온다. 멀리서 와서, 잠시 잠깐 ‘착지’했다 멀리 떠난다. 아무도 서 있지 않는 텅 빈 정류장에 버스가 머무는 시간보다 잠시 잠깐이다. 그 잠시 잠깐 사이엔 무수한 ‘때’가 있다. 크게는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코헬렛 3장 2절). 태어날 때와 죽을 때 사이엔 눈금자의 눈금처럼 헤아릴 수 없는 때가 있다. 울 때와 웃을 때, 노래할 때와 노래하지 않을 때, 떠날 때와 머물 때…. 심을 때와 심긴 것을 뽑을 때 사이엔 때와 함께 우리가 아는 계절과 알지 못하는 계절이 있다.

이곳엔 오래된 정류장이 있다. 그리고 정류장만큼이나 오래된 슈퍼가 있다. 그 슈퍼에는 백발의 여인이 있다. 슈퍼에서는 정류장을 지나가는 몇개 안 되는 버스들의 버스표를 판다. 여인은 첫 버스가 정류장을 지나가기 전에 슈퍼 문을 열고, 마지막 버스가 지나가고 나서야 슈퍼 문을 닫는다. 밤이 꽤 깊어서야 정류장을 지나가는 마지막 버스에서 아무도 내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여인은 슈퍼 불을 환히 켜둔다. 담배나 라면, 술을 사려는 손님조차 없는 한겨울 밤에도 여인은 마지막 버스가 정류장을 지나가고 나가서 슈퍼 문을 닫고 불을 끈다. 나는 그제야 슈퍼 한쪽에서, 아이스크림 냉장고가 내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들르며 검은 털로 뒤덮인 몸을 웅크리고 잠을 청한다. 여인은 내게 물과 먹을 걸 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가 그 여인의 개라고 말한다. 일흔이 넘은 자신의 생에(역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여인은 나를 자신의 곁에 매어두려 하지 않는다. 나는 여인이 슈퍼 미닫이문 옆에 늘 놓아두는 물로 혀를 축이고 정류장으로 간다.

정류장에는 사람이 아무도 서 있지 않다. 아무도 내리지 않고, 아무도 타지 않은 버스가 정류장을 지나간다. 버스에 실린 빈 의자들이 정류장을 지나간다. 강원 화천군 외진 마을에 덩그러니 있는 정류장은 마지막 정류장이다. 세상의 모든 정류장은 마지막 정류장이다. 버스를 타고 그곳까지 와서 내리는 사람도, 버스를 타기 위해 그곳까지 온 사람도, 그냥 그곳에 와서 서성이던 사람도 결국은 떠나는 곳이 정류장이기 때문이다.

초코파이 상자처럼 네모반듯하고 제법 긴 의자가 놓여 있는 정류장은 때때로 아주 작아 보인다. 모래알처럼 작아 보인다. 정류장은 어쩌면 모래알인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정류장을 모으면 광활한 사막이 펼쳐질지도 모른다.

버스가 달려온다. 정류장에 정확히 선다. 모든 버스가 그런 것은 아니다. 정류장에 조금 못 미쳐 서는 버스도, 정류장을 지나쳐 서는 버스도 있다. 버스에서 아무도 내리지 않는다. 버스에서 누군가 내렸다면 나는 꼬리를 흔들며 달려갔을 것이다. 누구든, 버스를 타고 이곳까지 와 정류장에 내린 그 누군가를 내 검은 온몸으로 반겨줬을 것이다.

늙고 왜소한 여자가 정류장으로 느릿느릿 걸어온다. 늙은 여자는 혼자다. 늙은 여자는 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지 못한다. 나는 늙은 여자를 알고 있다. 그녀는 슈퍼의 단골이다. 바라보는 것은 시작이다. 바라보는 것에서 모든 존재가 생겨나고, 움직인다. 내가 바라보는 것에서,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생겨난다.

사람을 바라본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하다. 사람을 볼 때 나는 가장 행복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대개의 사람들은 사람을 바라볼 때 한없이 불행해 보이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버스가 온다. 늙은 여자가 버스에 오른다. 버스가 떠난다. 어스름이 내린다. 여인이 슈퍼의 불을 밝힌다. 나는 슈퍼로 가 여인이 내 밥그릇에 부어 놓은 밥을 먹고 티브이 소리를 듣다가 다시 밖으로 나온다.

조금 있으면 마지막 버스가 지나갈 것이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달도, 별도 안 떠 하늘은 나만큼이나 검은 거대한 구멍 같다. 나는 저 구멍 속에 있을 셀 수 없이 많은 정류장들을 생각한다. 누군가 서 있는 정류장, 아무도 서 있지 않는 정류장, 하루 종일 버스가 한 대밖에 지나가지 않는 정류장, 버스가 10분 5분 간격으로 지나가는 정류장, 버스가 더는 지나가지 않는 잊힌 정류장….

마지막 버스가 달려온다. 누가 타고 있을까? 아무도 타고 있지 않을까? 그 누구는, 혹은 그 아무도는 당신일 수도 있다.

김숨 소설가

김숨 소설가


Today`s HOT
트럼프 지지 표명하는 헤일리 오타니, 올스타전 첫 홈런! 오타니, 올스타전에서 첫 홈런! 말레이시아 항공 17편 격추 10주년
쓰레기장에서 재활용품 찾는 팔레스타인들 방글라데시 학생 시위대 간의 충돌
삼엄한 경비 서는 중국 보안요원 라스베이거스에서 공세 재개한 바이든
인도 힌두교 전차 축제 트럼프, 붕대 감고 미국 공화 전대 등장 눈부신 호수에 금빛 물결 증세가 부른 케냐 Z세대 반정시위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