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당이 사라진 시대다. 정의당이 원외로 퇴장했음에도 진보정당이 원내에 있다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조국혁신당이 정의당을 대체했다는 주장도 그러하다. 실제로 정의당에 투표하던 유권자 다수가 조국혁신당으로 옮겨 갔다는 분석도 적잖다. 당명으로만 본다면 새진보연합이나 진보당도 원내 진보정당이다. 어쩌면 ‘진보’의 의미가 그만큼 희미하거나 무의미한 시대라는 생각도 든다.
2019년 ‘조국 사태’ 이래로 이번 총선까지 ‘장기 조국 사태’라 부를 만한 여진이 이어지고 있다. 서초동 집회에서 시작해 진보운동 분열이 가속화됐는데 이번 총선에서 연합정치를위한시민회의와 진보당의 더불어민주당 위성정당 참여 등을 겪으며 정점을 찍었다. 2020년 위성정당 사태 당시에 비해 진보운동 진영의 비판은 침묵에 가까웠다. 심지어 여러 이유를 들며 정당화하기도 한다. 윤석열 정부에 대한 원한과 응징에 기댄 ‘진보’라는 묶음은 이토록 아슬아슬하다. 또다시 적당히 봉합하며 불편한 동거를 계속할지 구체적 분열로 이어질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분열의 가능성은 높아지고 있다.
진보운동의 외적 조건도 녹록지 않다. 진보운동의 사실상 유일한 입법파트너로서 민주당은 입법활동을 대통령과의 대결 수단으로 활용할 것이다. 이미 협치조차 수싸움의 일부다. 그렇기에 진보운동은 민주당의 당략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개혁입법이면 무조건 좋다는 식으로 절차와 규범의 파괴를 외면할 수도 있다. 과격한 수단의 활용과 정치를 대체한 대결이 상식이 되고 있다. 이렇듯 진보운동의 민주당 ‘견인론’은 또다시 미망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더불어민주연합 공천에서 보았듯, 진보운동은 민주당의 하위파트너로 전락한 것이 현실이다. 시민과 여론의 힘으로 민주당을 포위·견인하기는커녕 민주당에 포획됐다. 국민의힘 왼쪽 지대가 정의당의 퇴장과 함께 민주당 일극으로 통일되며 민주당과 진보운동의 비대칭적 관계는 이전보다 더 심화되었기 때문이다. 정당의 힘이 시민사회를 압도(‘천만 당원 시대’)하는 가운데 다수 시민이 진보운동을 눈엣가시로 여기거나 필요성을 체감하지 못하는 상황도 무시할 수 없다.
숨이 턱 막힌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고 말해야 할까. 근거 없는 낙관은 해롭다. 우리는 ‘뭐라도 하자’는 의지주의와 ‘이럴 줄 알았다’는 냉소 바깥을 상상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 사회와 정치 그리고 진보운동에 대한 냉정한 인식과 진단에서 출발해야 한다. 포퓰리즘 정치세력으로 치닫고 있는 민주당, 원한과 응징에 기반한 진보 정치·운동의 정념적 토대, 그로부터 정치 그 자체의 붕괴까지도 벌어질 수 있는 현실에 대한 진단 말이다. 덧붙여 이번 총선에서 위성정당을 둘러싸고 나타난 진보운동의 무능과 분열은 깊이 논의되어야 한다. 진보운동이 이조차도 넘어서지 못하면서 시민들에게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