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산양의 운수 좋은 날

김기범 정책사회부 차장

강원 화천·양구군 민통선 부근에 사는 산양 KG(한국 산양의 영어명 Korean Long tailed goral에서 따온 이니셜)에게 지난 3월21일은 일진이 매우 사나웠던 날로 기억될 테다. 그날 오전 평화의댐에서 햇볕이 따스하게 비추면서 비교적 먹이가 풍부한 남사면 쪽으로 갈 때만 해도 KG는 이날 자신에게 닥쳐올 미래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인간들이 설치한 아프리카돼지열병 울타리 사이 좁은 구멍을 통해 도로로 나간 KG와 가족들은 처음엔 소풍이라도 간 듯한 기분으로 봄볕을 즐겼다. 하지만 한가로운 기분은 잠시였을 뿐, 다시 숲으로 돌아갈 길을 찾지 못하게 되면서부터 소풍 같던 날은 악몽으로 변해버렸다. 아무리 달려도 숲으로 돌아갈 길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초조해진 탓에 평화의댐 방향으로도 가보고, 양구군 방향으로도 달려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가끔씩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거대한 쇳덩이들을 보면서 공포심은 점점 커졌을 것이다.

얼마나 헤맸을까. 한참을 달린 끝에 개울과 민가로 인해 돼지열병 울타리가 끝나는 지점에서 겨우 숲으로 돌아갈 길을 찾았을 땐 안도의 한숨이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KG의 수난은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숲으로 돌아가려는 찰나, 민가에서 키우는 개들이 따라붙었기 때문이다.

KG와 동행한 가족은 재빨리 숲으로 뛰어들어갔지만 KG는 개들에게 따라잡혔고, 어느새 개 한 마리와 대치하는 형국이 되었다. 평상시 같으면 개가 짖건 말건 제 갈 길을 갔겠지만, 극도의 공포 속에 한참을 헤맨 탓에 잔뜩 신경이 곤두선 KG는 자신을 향해 마구 짖는 개를 그냥 두고볼 수 없었다.

KG가 연신 발을 구르며 화를 내봤지만, 개는 아랑곳없이 그의 주위를 맴돌며 맹렬히 짖어댔다. 자신의 절반 정도 덩치인 개가 마구 짖어대는 소리에 약이 오른 KG는 계속해서 개를 위협하면서 성질을 부렸지만, 개의 끈기도 만만치 않았다. 개는 좋아하는 먹이인 빵을 주겠다며 돌아오라는 주인의 외침도 무시한 채 계속 KG를 위협했다. 둘의 대치가 끝난 것은 두 시간여가 지나서로, 지칠 대로 지친 KG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숲으로 돌아갔다. 그야말로 힘든 하루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겨울 KG의 동족 다수가 겪은 일에 비하면 숲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KG는 매우 운이 좋은 편이다. KG의 동족인 천연기념물이자 멸종위기 포유류 산양 중 800마리에 가까운 수는 지난겨울을 못 넘기고 죽어갔다. 아프리카돼지열병 울타리와 폭설 때문이었다. 아프리카돼지열병 울타리 설치 후 울타리 영향으로 죽은 산양의 수는 1000마리에 달한다. 국내에 서식하는 산양 수의 절반에 달하는 숫자다.

멸종위기종의 절반이 불과 몇년 사이 목숨을 잃었지만, 한국 정부에서 이를 책임지는 이는 아무도 없다. 환경부도, 문화재청도, 지자체도 사후약방문식,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식의 대책만 내놓을 뿐이다.

게다가 KG를 비롯한 산양들, 그리고 여러 야생동물의 수난은 한동안 끝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환경부는 울타리를 시범적, 부분적으로 개방하겠다는 대책을 발표했는데, 대책 시행 전부터 이미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산양도 잃고, 외양간도 못 고치는 행태 속에 KG와 그 동족이 멸종으로 가는 시계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

김기범 정책사회부 차장

김기범 정책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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