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 한 귀퉁이에 붉은 작약이 피었다. 진분홍 꽃잎이 매력적이다. 작약과 모란은 사촌간이지만, 모란은 크고 화려한 색깔의 꽃을 자랑하는 나무이고, 작약은 상대적으로 꽃이 작으면서 꽃잎 개수도 적은 풀이다. 모란이 젠체하는 꽃이라면, 작약은 낯을 가리는 꽃이다. 화기(花期)가 짧은 것도 부끄러움 때문일 게다. 특히 백작약의 함초롬한 모습은 때론 가련하게도 느껴진다. 그에 따라 모란은 부귀영화, 작약은 수줍음 등을 상징한다. 중국에선 작별할 때 작약을 꺾어주던 풍습에 따라, ‘가리(可離)’, 즉 이별의 꽃이기도 하다. 작약에 얽힌 가슴 아픈 이야기가 있다.
“충렬왕 22년에 왕과 공주가 원나라에 갔다. 이듬해 진왕(晉王)이 자기 나라로 귀환할 때 황제가 그의 관저로 가서 전송했는데, 왕과 공주도 그 연회에 참가했다. 술자리가 흥겨워지자 공주가 노래를 부르니 왕은 일어나 춤을 추었다. 그해 5월에 귀국했는데, 때마침 수녕궁에 작약이 만발했다. 공주가 꽃 한 가지를 꺾어 오라 하여, 오랫동안 손에 잡고 완상하더니 감회를 못 이겨 눈물을 흘렸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이 들어 현성사에서 사망했는데 향년 39세였다.”(<고려사> 권 89 열전 2)
고려 충렬왕의 부인 제국대장공주는 칭기스칸의 손자 원 세조 쿠빌라이의 딸이다. 고려 원종의 맏아들인 충렬왕은 세자로 원나라에 있을 때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했다. 혼인 당시 공주의 나이는 19세, 충렬왕은 39세였다. 충렬왕은 이미 왕비(정화궁주, 貞和宮主)가 있는 유부남이었으니, 결혼 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게다가 낯설고 물선 타국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고려사>에는 제국대장공주의 타향살이 애달픔이 전해진다.
머나먼 이국땅에 시집와서, 어원(御苑)에 핀 작약을 보며 그녀는 고향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그녀의 죽음에 원나라 무종(武宗)은 ‘청헌(靑軒)의 도리(桃李)와 같이 꽃답던 청춘이 찬 이슬 맞은 갈대같이 갑자기 시들었다’며 슬퍼했다. 후세 사람들은 공주의 죽음을 두고 고향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이 가슴속의 병이 되었을 것이라 풀이한다. 중국에서는 작약의 작(芍)자가 ‘약속한다’는 약(約)자와 발음이 비슷하여 ‘약속의 꽃’이라는 의미로도 쓰였다. 이별의 꽃이자 재회를 약속하는 꽃이었던 작약. 제국대장공주의 심상을 그대로 전하는 꽃이라 할 만하다.
고려 26대 충선왕의 어머니인 제국대장공주의 이름은 홀도로게리미실(忽都魯揭里迷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