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평이 니가 시를 쓰고 읽어줄 때가 너무 좋아. 그럴 때면 너한테서 막 빛이 난다. 반딧불 천 마리가 모인 것처럼. 네 시를 읽으면 눈물이 나고 마음이 맑아지고 힘이 나. 난 알아. 넌… 강한 아이야. 평아, 넌 꼬옥 훌륭한 시인이 될 거야.”
1980년대 ‘얼굴 없는 시인’으로 잘 알려진 시인 박노해의 첫 산문집 <눈물꽃 소년>(2024)에 수록된 수필 ‘연필 깎는 소녀’의 한 대목을 읽다 울컥하는 마음이 일었다. 근래 읽은 책들 가운데 가장 윤기 나는 물기가 있고, 뭉클한 감동이 있는 책이었다. 만약 당신이 어린 ‘평이’라면 마음이 어땠을까. 내 곁에서 나를 편들어주고 기꺼이 품어주는 ‘한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온통 설렜으리라. 소년은 그렇게 한 사람의 어른이 된다. ‘내 어린 날의 이야기’라는 부제를 단 33편의 수필을 묶은 산문집은 어린 평이를 키운 팔 할이 시인을 편들어준 사람들이었다는 점을 깨닫게 한다.
<눈물꽃 소년>은 전남 함평에서 태어나 고흥의 작은 마을 동강에서 자란 이야기를 묶었다. 취학 전부터 동강초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가장 먼저 떠오른 말은 ‘편(便)’이라는 단어였다. 책에는 어린 평이를 편드는 사람들이 여럿 등장한다. 엄니, 할무니, 형은 말할 것도 없고, 멕시코인 호세 신부님, 강석이 아재, 해성이 아재, 용식이 형, 연이 누나, 도서실 선생님, 수그리 선생님, 김점두 아저씨 그리고 선생님의 부당한 구타에 맞서 함께 울어주던 종만이, 인옥이, 영석이, 석만이… 같은 벗들이 있었다. 벗들과 함께 노동산에 오른 평이가 “근디 속도 없이 나는 좋다야. 같이 울어줄 동무가 여그 있응께”라고 한 말에 다 함께 울던 그날의 풍경이라니! 박노해의 산문집을 보며 1991년 사노맹 사건으로 투옥된 그도 1998년 출옥한 이후 많이 외로웠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유독 한 글자짜리 단어들을 좋아한다. 수년 전부터 곁, 편, 품 같은 한 글자짜리 단어들을 자주 애용하는 데에는 그런 사연이 있다. 과연 내 곁에서 나를 편들어주고 나를 품어주는 사람이 몇 명이 있는가. 아니, 몇 명은커녕 단 한 사람이라도 있는가. 나를 편드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하며, 외로움과 고독에 내몰린 사람들이 급증하는 듯해 걱정스럽다. 지난달 울산 지관서가 장생포에서 열린 ‘우리가 서로의 곁이라면’이라는 인문토크를 마친 후 그런 생각이 더 강해진다.
언젠가 누군가가 세 단어 중 가장 필요한 단어가 무엇이냐고 물은 적 있었다. 나는 곁이라고 말하려다 ‘편(便)’이라고 고쳐 말했다. 나를 편드는 사람을 만날 때, 나라는 존재가 썩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낀다. 그것이 ‘자뻑’이든 말든. 5월은 가정의달이다. 부디, 5월 한 달만이라도 어린이와 청소년을 일단 무조건 편들어주자. <눈물꽃 소년>에서 단 한 명의 책 읽는 아이를 조용히 지켜주던 도서실 선생님처럼. 외롭고 아픈 10대들을 위해 ‘은미(隱微)한 당신’이 더없이 필요하다. 이제는 아이 하나 키우는 데 온 마을이 아니라, ‘온 나라’가 필요해졌다. 1923년 개교해 100주년을 맞은 고흥 동강초등학교는 시인이 다닐 무렵인 1967년 1798명에 이르렀으나, 2023년 현재 62명으로 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