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하거나 당에 참여하지는 않아도 진보정당과 정의당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승자 집단 사람들 중에도 존재한다. ‘힘의 균형’을 중시하는, 적어도 ‘공화’의 가치와 중요성을 아는 이들이다
이들에게 정의당은 제3지대에 거주하는 ‘힘의 균형자’ 혹은 그들 중의 하나다. 이것의 사라짐은 관심 사안이 아닐 수 없다
빵석! 2000년대 초의 민주노동당에 이어 한국 진보정치의 대표 격이었던 정의당이 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녹색당과 선거연합당(녹색정의당)을 만들어가면서까지 고군분투하였으나, 그리되었다.
충격적이지는 않다. 선거 과정 내내 의석 확보에 필요한 정당 지지율 3%를 넘기지 못했기에 충분히 예견된 바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게 있다. 정계는 물론, 학계와 언론계 등을 중심으로 정의당에 대해 우려 섞인 것이긴 하지만 관심이 커진 것 같기 때문이다. 선거 이전에 필요했던 관심이 0석이라는 결과를 낳은 후에야 커진 건 왜일까?
총선 후 한 달여에 걸쳐 내가 참여한 연구자나 활동가들과의 이러저러한 모임과 만남 등에서 접한 논의들에 바탕해 보면 우려 섞인 관심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민주화 이후 한국 정당정치의 전개 과정에서 만만치 않은 역사성을 보유한 정당이라는 것, 둘째, 한국정치에서 사회경제적 약자를 대표하는 진보정당이 필요하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정의당은, 역사는 만만치 않다. 정의당만의 역사로만 봐도 창당한 지 12년이다. 이념·정책과 주체의 측면에서 보자면, 길게는 2000년에 창당되어 2004년 총선에서 4·19혁명 이후 40여년 만에, 또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이후 17년 만에 진보정당의 국회 의석 확보를 이뤄낸 민주노동당에 가닿아 거의 25년이 된다.
이 오랜 세월을 내내 관통했던 이념·정책이 평등과 분배를 중시하는 경제민주화와 복지강국론이고, 그 주체는 노회찬과 심상정을 비롯해 1980년대와 1990년대 초 투옥과 투병은 물론이고, 목숨을 내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반독재민주화운동에 복무했던 활동가들과 그들의 계승자들이다. 그 세월의 와중에 세상을 떠난 이들도 있고, 투병 중인 이들도 적지 않다. 오래되었다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인고의 시간을 거치면서도 원내정당 지위를 유지했고, 이념·정책적 정체성과 주체와 조직의 지속성과 안정성을 유지해왔다는 게 중요하다. 정당이론에서는 이를 ‘제도화’라고 한다. 한마디로 말해 “쉽게 망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2024년 4월10일을 전후로 해 그 역사가 종말 위기에 처했다. 국회 의석을 차지하는 데 실패했다. 활동가들은 이미 떠났거나 떠나야만 할 처지에 있다. 그 상징적인 모습을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진보정치인으로서는 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다선(4선) 의원인 심상정 의원이 낙선한 것과 그 직후 정계은퇴를 선언했다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심 의원은 “25년 진보정치 소임을 내려놓겠다”고 밝혔다. 정의당은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가라” 했던 고(故) 노회찬 의원의 마지막 당부를 (현시점으로서는) 지키지 못했다. 쉽게 망하지 않을 거라 -그래도 한두 석 정도는 차지할 수 있을 거라- 여겨졌던 제도화된 정당이 그야말로 망할 처지에 놓였다. 학문적으로는 정당 제도화 이론의 측면에서, 실천적으로는 정의당 재건 여부 혹은 이후의 진보정당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후자는 두 번째 이유인 진보정당의 필요성과 연결된다.
정의당 재건이나 새 진보정당 관심
한국의 민주주의는 제한적이다. ‘노동 없는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평등이 능력 차이의 정당한 결과로 인식되고 용인되는 민주주의다. 단지 경쟁 과정 및 절차가 공정하면 승자가 독식해도 괜찮다고 여겨지는 민주주의다. 누구나 경쟁의 기회와 역량 강화의 조건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는 썩 중요치 않다. 그런 기회와 조건도 개인들이 각자 알아서 얻을 수 있는 (강요된) ‘자유’ 세계에서 살고 있다고 가정하는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런 민주주의의 결과는 ‘이미 승자인 자들의 지배질서’다. 이번 총선 과정에서도 정책이 실종되었다고 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질서에서 벌어지는 권력게임이 총선이기 때문이다. 정치하는 이들끼리 죽자 살자 싸우는 거 같지만, 실제로는 그 누구도 죽지 않는다. 특히 거대 양당 세력은. 한편에서는 검찰독재가 정권을 잡아 민주주의가 퇴행하고 있다고 경고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범죄집단이 권력을 잡을 거라 위협했다. 그런데 그 싸움의 와중에 민주주의의 본령인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보호(護民), 즉 ‘민(民)’의 삶과 고통 해소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다. 승자들의 싸움에서 민의 문제가 들어설 자리는 넓지 않다.
그런 질서에서 싸움이 벌어지는 한국에서 노동은 부정적 집단의 이름으로 불린다. ‘노동=대기업 정규직 노조=노동귀족=이기적 사회집단’이라는 이데올로기 코드가 장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동은 민주주의의 핵심, 민의 이름이다. 노동귀족으로 부를 수 있는 층과 굳이 구분해 호명하자면, 노동약자들이 바로 민이다. 저임금·장시간·극한 노동을 감내함에도 고용과 소득의 불안정에 시달리면서, 산업재해와 직장갑질의 피해를 집중적으로 받는 비정규직 청년, 여성, 중장년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 등이 그들이다. 근간에 들어서는 노동자의 지위마저 인정받지 못하는 특수고용 및 플랫폼 노동자도 주요 구성층이다.
이들을 정치적으로 대표하겠다 자처한 혹은 대표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던 이들이 바로 진보정당, 정의당이다. 진보정당은 민 스스로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정치를 하겠다고 나선 이들이 참여하는 그릇이기도 하다. 자본재화도 지식재화도 없는 이들이 정치·사회적 교섭을 위해 믿고 의지할 것은 노조나 정당 같은 조직재화밖에 없기 때문이다.
‘노동약자’ 열세 상태 지속 가능성
더불어민주당 계열의 정당도 민을 대표하겠다고 나섰던 적이 있다.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정당’임을 내놓고 표방했을 때였다. 노동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으려고 했다. 결국은 한국노총이나 민주노총의 간부 출신 인사들을 스카우트해 국회의원을 만드는 식에 그첬다. 특정 개인 차원의 ‘호선(co-optation)’에 그쳤던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마저도 하지 않는다. 노무현 정권을 전후로 해서 민주노동당 같은 진보정당이 아니라 현 더불어민주당 계열의 정당으로 들어가 정치를 해온 1980년대 반독재민주화운동 세력이 있다. 바로 86세대 정치인들이다. 이들 덕분에 더불어민주당 계열 정당도 진보정당이라고 불린다. 그런데도 서민의 대표라는 색채는 오히려 더 희미해졌다. 이번 총선에서 봤듯이 노동계의 참여 없이 몇몇의 군소정당들과 사회운동단체들을 주축으로 위성정당을 만들어 아예 조직 수준에서 줄을 세우는 식으로 변형되었다. 그게 옳으냐 그르냐라는 규범적 비판의 문제를 떠나, (범)진보로 불리는 진영만 놓고 봐도 정당정치 현실이 ‘비(非)노동’으로 구조화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한국은 이제 ‘선진국’이다. 경제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그렇다. K팝에 이어 K방역, K민주주의, K방산 등 지난 문재인 정권에서 유행한 각종 ‘K 담론’의 등장은 그런 위상에 대한 자부심에 바탕해 나왔다. 한마디로 한국은 잘나가는 나라다. 그래서 분단과 전쟁, 산업화와 민주화 시대의 고역과 희생, 인내와 열정을 더 이상 숭고하고 명예롭게 여기지 않으며 존중하지도 않는다(‘역사 인식의 삭제’). 그런 중에 식자층조차 가난해서 고통받으며, 노력해도 그 대가를 받지 못하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애써 잊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계급 인식의 삭제’). 더 좋은 세계에 대한 사유가 사라지고, 현상 분석에만 치중한 매일매일의 정치평론이 판을 치는 이유다(‘유토피아 모멘트 인식의 삭제’).
그런데 한국에서는 상위소득 10%가 전체 소득의 43%를 차지하고 있다(통계청, ‘2022년 가계금융복지조사’ 기준). 노조 조직률이 70%를 넘어설 정도로 높고 사회민주당 같은 진보정당이 오랫동안 집권한 스웨덴에서 상위 10%는 전체 소득의 30.8%를 차지한다(WID, 2020년). 한국은 미국(45.5%)과 비슷한 수준이다. 사회적 힘의 관계에서 노동약자가 열세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바람직한지의 여부를 떠나 미국처럼 트럼피즘에 동조해 분노를 표출할 자리를 갖고 있지 못해서이기도 하다. 그런 자리마저 거대 양당 간 전쟁 속에 나타난 팬덤과 극우적 광기에 빼앗긴 상태이다. 정의당의 소멸은 그런 상태의 지속 혹은 영구화 가능성을 의미한다. 최근 일고 있는 ‘K피크(peak)론’의 확산, 즉 한국이 “오를 만큼 올라 이제는 내리막길에 들어설 것”이라는 전망에 비추어볼 때도 심각하다. 특히 약자층에게 쏠릴 추락의 충격을 완화할 정치·사회적 마찰력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지하거나 당에 참여하지는 않아도 진보정당과 정의당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승자 집단에 속하는 이들 중에도 존재한다. 정치적·사회경제적 ‘힘의 균형’을 중시하는 이들이다. 적어도 ‘공화(共和)’의 가치와 중요성을 아는 이들이다. 이들에게 정의당은 제3지대에 거주하는 ‘힘의 균형자’ 혹은 그들 중 하나다. 이것의 사라짐은 관심 사안이 아닐 수 없다.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로, ‘세계와 시민’ ‘정치의 인문학적 탐색’ 등의 과목을 가르친다. 참여사회연구소 부소장, ‘시민과 세계’ 편집위원,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소장, 노회찬정치학교 교장 등을 역임했다. <정당> <헬조선 3년상> 등의 저서와 ‘노동존중 정치와 노회찬의 6411정신’ ‘한국 불평등 민주주의의 정치사적 기원’ 등의 논문이 있다.